365일의 다음은 새로운 1일!

팔공산에 오르며 쌓은 반성의 돌탑

등록 2006.01.02 11:42수정 2006.01.0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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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정상에 시선을 고정 시켰습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팔공산(경북 경산) 꼭대기에 내 굳은 의지를 미리 걸쳐놨습니다. 깊은 호흡으로 한 번 더 나 자신을 추슬러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힘차게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정상을 향했습니다. 2005년을 보내고 2006년을 맞는 나는 분명 달라야 했습니다. 365일의 다음은 366일이 아닌 새로운 1일이어야 했습니다.


2005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하루하루가 만들어 준 1년이라는 시간. 되짚어 본 365일은 후회와 아쉬움들로 가득했습니다. 이젠 지나간 시간이라 그저 뜻 없이 덮어 버려선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이제 과거 속으로 묻혀질 시간이라 그저 뜻 없이 묻어 버려선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옹이로 남겨 새로이 펼쳐질 365일이라는 시간 속에 나를 위한 감시병으로 세워 놓고 싶었습니다.

12월 31일. 팔공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내딛는 발걸음에 지난 한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기쁨의 눈물을 찔끔거렸던 순간도, 서러움에 가슴이 먹먹했던 순간도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자식의 커가는 모습은 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기쁨이었습니다. 봄에는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던 동화책을 가을이 되자 막힘없이 술술 읽어 내려갔습니다. 숫기가 없어 늘 뒤로만 숨던 아이가 자신의 나쁜 습관을 한방에 날려 버리겠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다짐을 하며 힘차게 격파를 했습니다. 괜한 심통을 부려 엄마 속을 썩였다며 이제는 착한 딸이 되겠다는 삐뚤빼뚤한 한 줄의 사과 편지는 온 하루를 희열로 가득 채우기도 했습니다.

김정혜
늙어가는 부모의 초라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하물며 부모는 자식에게 더 내어줄 것이 없나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는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행여나 자식에게 짐이 될까 야윈 몸뚱이 더 움츠리며 입가에 매단 희미한 미소만으로 모든 말씀을 대신하셨던 부모님들. 당신들의 울타리가 이토록 든든한 줄 이제야 깨달아가는 뒤늦은 철없음이 서럽도록 가슴 아픈 하루하루도 있었습니다.

김정혜
부부일심동체라는 그럴 듯한 핑계 앞에 난 또 얼마나 비겁했는지... 먼저 손 내밀기보다 먼저 다독거려 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기 바빴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남편은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발버둥쳤을지 짐작조차 해보지 않았습니다. 또 그 짐이 얼마만큼의 무게로 남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고단한 하루가 있기에 내 하루가 편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았던 난 어쩔 수없이 어리석은 아내였습니다.


김정혜
콩 한쪽도 나누어 먹으려는 내 고마운 이웃들에게 나는 과연 얼마나 너그러웠을까. 아무리 움켜 쥐어 봤자 한 웅큼밖에 안 되는 것들을 내 것이라 고집 부리진 않았을까. 행여 그들과의 사이에 금이라도 그어 놓진 않았을까. 혹여 말로만 이웃사촌이라 떠들어댄 건 아니었을까. 이웃들이 건네는 따스한 손길을 나는 과연 얼마만큼 따스하게 맞잡아 주었을까. 이제부터라도 이웃들이 건네는 웃음에 나 스스로 티끌만큼도 부끄러워져선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팔공산을 오르다 보니 군데군데 수북하게 쌓인 돌탑들이 보였습니다. 누군가는 간절한 소원을 대신해 돌 하나를 얹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반성을 대신해 돌 하나를 얹었을 것입니다. 그런 나름의 돌들이 거대한 탑을 만들어 놓았음이 분명했습니다. 탑 꼭대기에 조심스레 돌을 얹었습니다. 소원보다는 반성을 대신한 돌이었습니다. 아니 온전하게 반성할 수 있기를 소원했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만치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마엔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앞서 오르던 남편과 딸아이가 잠시 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희야. 힘들지?"
"네."
"힘들어도 한번 올라가 보는 거야. 산에 올라가면 힘들었던 만큼 기분도 좋을 거야."
"네."

딸아이도 어지간히 힘이 든 것 같았습니다.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발그레하니 홍조를 띠고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힘든 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힘든 만큼 보람도 크다는 걸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땀방울이 흐르는 이마와 열기로 후끈거리는 등이 시원해질 때의 그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또 힘든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 어떤 건지 아이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김정혜
정상에 다다를수록 경사가 심했고 돌계단은 가파르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먼저 오른 남편이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또 아이가 내 손을 잡아 올려주었습니다. 숨은 더 차오르고 땀은 온 몸을 적셨습니다. 하지만 정상은 점점 우리를 가까이 품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아이도 나도 오로지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어느덧 정상은 눈앞이었고 산 아래는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김정혜
드디어 정상에 올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갓바위 부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소원을 비느라 마음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네들이 비는 소원이 뭔지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어도 다만 그네들의 간절함만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팔공산 정상을 휘감는 한겨울 찬바람이 무색했습니다. 그네들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가 갓바위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 속으로 뜨겁게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김정혜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부모에게 죄스럽지 않은 자식이고 싶습니다. 남편에게 힘이 되는 아내이고 싶습니다. 내 이웃에게 좀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를 내 가슴으로 보듬을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더불어 내 마흔 셋이 결코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겨지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김정혜
2005년. 나 하나를 놓고 본다면 많은 꿈이 이루어진 한해였습니다. 또한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한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 꿈을 향해 달리는 순간순간.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에겐 사실 많이 소홀했습니다. 부모님, 남편, 아이, 이웃... 그들이 바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인 것을 순간순간 망각했습니다. 새로운 한해. 내가 꾸는 꿈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닌 그들과 더불어 꾸는 꿈이고 싶습니다.

2006년. 다시 출발선에 섰습니다. 굳이 365일을 가로막아 금을 그어 놓은 것은 다시금 새발걸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새로 내딛는 발걸음은 지난 시간을 되밟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금 밟아 가는 내 발걸음에 지난해의 후회와 아쉬움이 기름진 자양분이 되어 주기를 소원합니다. 팔공산 돌탑마다 하나씩 얹어놓은 내 반성의 돌들이 더 높은 탑을 쌓는데 톡톡히 한몫 해주기를 소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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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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