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TV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국내에 거주하는 일단의 30-40대 일본 남성들이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외치며 환호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오옷! 이제 일본 아저씨들마저 우리나라를 좋아하게 된 거야!"라며 반가워해야할 것 같은 이 장면을 시청한 한 지인은 저런 행위는 역설적으로 일본인들이 얼마나 역사의식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맞네! ‘대~한 민국!’이라는 집단적 환호 속에 놓여있는 한국인의 집단적 정체성, 국가주의로 극복하고자 하는 열등감과 피해의식,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의 집단의식 형성 과정에서 일본이 한 역할 등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일본인으로서 그렇게 쉽게 환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한 민국!’을 따라 외치며 환호하는 일본인들의 얼굴 이면엔 그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의 진실을 집단적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나가다가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 자체에 대해 부정하고자 하는 무서운 얼굴이 존재한다.
최근 나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몇 가지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첫째, 왜 절대 다수의 일본인들은 이웃 나라 국민들에게 그렇게 잔혹한 짓을 하고도 그 책임은커녕 자신들의 저지른 행위에 대한 사실관계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무엇이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였는가?
둘째, 왜 절대 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들의 왕을 ‘인간’이 아닌 ‘신’이라고 믿는가? 그리고 왜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주변국의 지식인들은 문제의 근원을 일본의 ‘천황제’로 보고 있는가?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이제는 90세 전 후반의 노인이 된) 일본 군인들의 인터뷰 장면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강간했던 증언을 하면서도 거의 대부분이 그러한 잔인무도한 행위에 대한 죄의식이나 책임감이 그다지 없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일관된 주장은 ‘상급자의 명령 혹은 천황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범죄의 행위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부인하거나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사실’에 대한 부인, ‘ 책임’에 대한 부인, ‘계속되는 문제’에 대한 부인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에 대한 부인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칫 어느 누구에게도 공식적으로 기억되지 않은 채, 역사 속에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던 난징대학살의 진실을 고발한 <난징의 강간>의 저자, 아이리스 장을 일컬어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마녀’라고 공격하는 극우파 일본인들은 일본이 난징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철저하게 부정한다.
한편, 난징에서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학살하긴 했지만 그 숫자를 최소화하거나 모든 전쟁에서 발생하는 ‘보편적 현상’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난징대학살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희석화하고자 하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은 ‘사실’은 어느 정도 인정하되 ‘책임’은 부인한다.
또 다큐멘터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과 그 책임을 인정하되,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일뿐 현재의 일본인들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라는 정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계속되는 문제’에 대한 부인일 수 있다.
나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보다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로 인해 일본인들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본인들의 일상과 삶 속에서 어떻게 연속적 ‘책임’의 의무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사람들의 존재가 더욱 염려스럽다. 어떤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부정하는 것이다.
강간과 살인을 허용한다는 상부의 명령이 사실은 허용이 아니라 강제였다는 것을 증언한 한 참전 군인은 “당신도 다른 군인들처럼 강간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당시에 강간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었다. 나도 남자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증언 내용뿐만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행위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였다. ‘나도 남자다’라는 발언은 중대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고백’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아이들이 수박 서리하러 갈 때, 실은 나도 했었어. 안 하면 왕따 당했거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전장의 기억>(2002, 이산)에서 천황제라는 제국의식(제국주의)과 ‘일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 그리고 인종주의라는 평상시의 폭력성이 어떻게 전쟁의 폭력성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일상과 전쟁의 이분법이라는 신화를 깨고자 시도한 바 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대한 것인지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일본인들, 그들 범죄의 피해자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일본인들. 그들이 두려운 건 그들의 파렴치함과 무지함이 아니라 언제든 또 다시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나는 비로소 일본인들의 왜곡된 역사의식과 일본의 ‘천황제’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집단주의 속에 어떻게 개개인이 죄의식을 상실하고 ‘우린 아무 잘못도 없다’는 집단 최면에 빠질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확인했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다.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이다.
<난징대학살>에서 가장 가슴 깊이 여운을 남긴 말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기억한다’는 행위, 특히 난징대학살과 같은 집단적 경험에 대해 상기하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깨닫게 해 주었다.
일본인들은 난징대학살을 망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망각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의식적 기억이나 증언 행위와 마찬가지로 망각도 철저하게 정치적 행위이며 정치적 결단이다. 비겁하고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영혼을 ‘무지’라는 이름으로 타락시키고, 집단적으로 도덕적 불감증에 빠지게 하는 두렵고도 무시무시한 정치적 행위이다.
어떤 기억이 떠올려지는 것과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행위는 연속적으로 발생하지만,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의식적 기억 행위는 판단과 결단이 함께 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의식적 기억 행위가 집단적 경험에 관한 것일 때, 그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집단의 역사를 다시 쓰고 개개인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나아가 집단의 미래를 좌우하기에.
<난징대학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역시 이러한 집단적 최면과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일게다. 언젠가 <천황의 나라, 일본>이라는 다큐를 보면서 “어떻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저렇게 절대 다수의 멀쩡한 사람들이 한 인간을 신이라고 찰떡같이 믿을 수 있지?”라고 중얼거리자, 한 친구가 ‘그들은 천황제라는 주술에 걸린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러.면.
우리 역시 어떤 주술에 걸려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황우석 사태’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서서히 과학적 증명을 통해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황우석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전 국민적 ‘왕따’를 넘어서 테러와 도덕적 매장의 위협까지도 감수하면서 진실을 밝힌 한 방송사에 대해 쏟아지고 있는 미움과 증오의 기운이 아직도 횡행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
우리의 이러한 모습이 전쟁을 일으키고 30만 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그들’의 얼굴과 비슷해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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