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는 제 껍질에 노을을 새긴다"

시인 김명수, 첫 동시집 <산속 어린새> 펴내

등록 2006.01.06 18:48수정 2006.01.0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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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인 김명수 첫 동시집 <산속 어린 새>

시인 김명수 첫 동시집 <산속 어린 새> ⓒ 창비

산속 어린 새
작고 어린 새

공기조차 얼어붙은
추운 새벽에


다람쥐도 산토끼도
춥고 추워서

굴속에 옹크린
겨울 산속을

포르릉 포르릉
날아다니며

얼어붙은 겨울 숲을
잠 깨워 주는

잿빛 날개 녹색 깃털
작고 어린 새


-82쪽, '겨울 새벽 아빠와 약수터 갈 때' 모두


삼라만상을 불태워 사리알을 빚어내는 시인


시인 김명수의 눈에 삼라만상이 비치면 어느새 한 편의 깔끔한 시가 되어 나온다. 예로부터 사군자라 불리며 선비들이 붓에 먹을 찍어 즐겨 그리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인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 즉 생명 있는 것들이나 생명 없는 것이나 상관없이 모두 시가 된다.

사람들의 눈에 몹시 하찮게 보이는 생명체인 민들레나 쇠무릎, 개구리, 꽈리, 산속 작은 새, 소금쟁이도 시인의 눈빛을 결코 비껴가지는 못한다. 어디 그뿐이랴. 아주 쓸모없이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무생물체인 낡은 유모차나 조개껍데기, 구멍가게, 몽당연필, 전깃줄에 걸린 연 같은 것들도 시인의 눈에 비치면 곧 시로 새롭게 태어난다.

윗글을 언뜻 잘못 읽으면 김명수가 시를 아주 쉽게 쓰는 시인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시를 그리 쉽게 쓰는 시인이 아니다. 지난 197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3편이 한꺼번에 당선된 뒤 30여 년의 긴 문단 이력에도 불구하고 시집 7권뿐인 것만 보아도 그가 시를 얼마나 어렵게 쓰는 시인인가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아주 짧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의 눈에 삼라만상이 비치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오래 구르고 구르다가 어느 순간 그의 가슴 속에 담겨진다. 그의 가슴이 곧 삼라만상을 발효시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장독인 셈이다. 아니, 그의 가슴은 곧 삼라만상을 활활 태워 사리를 빚어내는 다비의 불꽃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오색찬란한 사리알처럼 빛이 나므로.

동시는 사물과 사물의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주는 것

글을 갈고 닦아 오색 찬란한 사리를 빚는다
시인 김명수는 누구인가?

▲ 시인 김명수
ⓒ김명수
"시는 인간의 영혼을 흔들 수도 있습니다. 동시집 <산속 어린새>에서도 우리는 김명수 선생 자신의 그리움, 아픔, 희망 같은 것 말고 그가 이 사회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길을 곳곳에서 발견합니다."-염무웅(문학평론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시인 김명수는 194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7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月蝕(월식)' '細雨(세우)' '무지개', 세 편이 한꺼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월식> <하급반 교과서> <피뢰침과 심장> <침엽수지대> <바다의 눈> <아기는 성이 없고> <가오리의 심해>가 있다.

동화집 <해바라기 피는 계절> <달님과 다람쥐> <엄마 닭은 엄마가 없어요> <바위 밑에서 온 나우리> <새들의 시간> 등을 펴냈으며, 여러 권의 산문집과 번역서를 펴냈다.

글을 갈고 닦아 오색 찬란한 사리알 같은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은 <오늘의 작가상> <신동엽 창작기금> <만해문학상> <해양문학상>을 받았다.
/ 이종찬 기자
"아이의 시간은 짧고, 어른의 시간은 길다./ 아이의 시간이 어른의 시간으로 이어질 수는 없을까?/ 동시는 모든 사물과 사물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뭇 존재의 근원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곳은 시간조차 영원한 곳이어서 아이의 시간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머리말' 몇 토막

지난 해 11월, 계간문예지 <창작 21>에 1960년대 군 속내를 발가벗긴 장시 '수자리의 노래'를 40여 년만에 발표(<오마이뉴스> 2005년 11월 15일자 참조)한 시인 김명수(60)가 첫 동시집 <산속 어린 새>(창비)를 펴냈다. 이번 동시집에는 시인의 어린 시절의 마음과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1부 '나무들의 약속', 제2부 '조개의 무늬', 제3부 '옥수수밭', 제4부 '몽당연필', 제5부 '돌배와 배'에 실려 있는 '봄비' '우주 컵 축구대회' '낡은 유모차' '아빠의 봄날' '누가 누가 지었을까' '할머니의 노래' '깊은 바다 모래밭 넙치가자미는' '어항 속 금붕어' '기차에서 내리면' '돌배와 배' '박꽃 핀 마을에' 등 59편이 그것.

시인 김명수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홀로 문학공부를 열심히 하던 시절에는 시뿐만 아니라 동시, 동화, 시조 등 쟝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썼다"고 말한다. 이어 "그때 습작했던 한 권 분량의 동시를 몽땅 잃어버린 뒤 한동안 동시를 잊고 살았다. 근데 일곱 번째 시집 <가오리의 심해>를 펴낸 뒤 문득 동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귀띔했다.

동심은 곧 삼라만상의 뿌리이자 진리

꽃 보고는 몰라요.
사과꽃은 하얘도
빠알간 사과 열리고
감꽃은 뽀얘도
붉은 감이 달리고
오이꽃은 노래도
파란 오이 열리고
자두꽃은 연분홍빛
검고 붉은 자두 되고
꽃 지고 열매 맺어
햇볕 받고 익게 되면
꽃 빛깔과 다른 열매
주렁주렁 열리고.

-13쪽, '꽃 보고는 몰라요' 모두


아이들은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그 어떤 모습을 눈에 비치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사실 그대로 숨김없이 말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어떤 모습을 사실 그대로 보려하지 않고 자꾸만 색안경을 끼고 보려고 한다. 또한 그 때문에 그 어떤 모습이 이리저리 구부려지고 망가뜨려져서 그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엉뚱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이 세상살이가 어렵고 힘이 든 것도 바로 그 어떤 모습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고, 가슴에 느껴지는 그대로 바라보는 동심(삼라만상의 뿌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삼라만상을 오래 찬찬히 바라보면 분명 그 삼라만상의 변화 속에 사람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진리가 속속들이 숨겨져 있다.

"꽃 보고는 몰라요"처럼 사람의 겉 모습만 대충 바라보고 그 사람의 속내까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사과꽃은 하얘도/ 빠알간 사과 열리고/ 감꽃은 뽀얘도/ 붉은 감이 달리고/ 오이꽃은 노래도/ 파란 오이"가 열리는 것을. 이처럼 시인 김명수는 아이들의 깨끗하고 까아만 눈빛으로 삼라만상의 진리를 꺼내들고 사람들의 시커먼 속내를 더듬는다.

삼라만상은 제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조개는
제 껍질에
노을을 새긴다.

해지는
저녁바다
수평선에 어린
눈부신 노을을
곱게 새긴다.

조개는
제 껍질에
물결을 새긴다.

조석으로
들고 나는
밀물 썰물을

남몰래
곱게곱게
홀로 새긴다.

-42~3쪽, '조개의 무늬' 모두


조개껍질에 물들어 있는 예쁜 빛깔이 곧 저만치 바다를 태우며 아름답게 지는 노을빛이요, 조개껍질에 새겨진 빗살무늬가 곧 수평선을 끝없이 출렁이며 다가오는 물결이라는 것이다. 즉, 조개껍질과 노을은 제각각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조개껍질과 물결 또한 서로의 뿌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 아이들의 마음은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도화지와 같다. 그 도화지에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어떤 색깔을 입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그 어떤 그림을 그려도 도화지와 그림은 서로 제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일 뿐이다. 아무리 뛰어난 그림이라 하더라도 도화지가 없는 그림은 없고, 그림이 없는 도화지는 그저 도화지일 뿐이다.

하긴, 이토록 곱고 아름다운 동시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조개는/ 제 껍질에/ 노을을 새긴다.// 해지는/ 저녁바다/ 수평선에 어린/ 눈부신 노을을/ 곱게 새긴다."라며, 그저 소리 내어 읽으면 그대로 노래가 되어 흥얼거려지고, 그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그대로 진리가 되어 우리들 가슴에 물결처럼 밀물 지고 썰물 지는 것을.

아이들도 슬픔과 아픔을 느낄 줄 안다

연아
가오리연아
줄에 매인 가오리연아
골목길에 전봇대가
너무도 많고
전봇대엔 전깃줄이
너무도 많아
전깃줄에 너풀너풀
걸려 버린 연아
하늘 높이 날지 못한
가오리연아
우리도 놀데가
골목밖에 없다.
차들이 달리는
골목밖에 없다.

-96쪽, '전깃줄에 걸린 연' 모두


흔히 동시라 하면 티없이 맑은 하늘과 짙푸른 바다, 그림처럼 흐르는 강과 경치가 빼어난 산, 예쁜 빛깔의 꽃과 구름처럼 가볍게 나폴거리는 나비 등 대자연의 아름다움만을 노래한 시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사람들의 욕심에 따라 제멋대로 파괴되는 삼라만상의 그늘진 모습을 동시에 담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댄다.

하지만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도 아름다운 모습만 눈에 비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늘 환하게 밝게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이 아이들의 눈에도 대자연의 그늘진 모습이 비치고, 전깃줄이 이리저리 헝클어진 삭막한 도회의 모습도 비친다. 아이들 또한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 슬픔과 아픔을 느낄 줄도 안다. 다만, 아이들이 느끼는 슬픔과 아픔은 어른들처럼 계산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 그 자체라는 것일 뿐.

시인 김명수의 첫 동시집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 김명수는 이번 동시집에서 자신의 어린 날들에 대한 그 어떤 추억 혹은 그리움, 아픔 따위를 드러낸 그런 동시만 쓴 게 아니다. 지금 당장 물질문명이 넘쳐나는 도회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과 도회의 삭막한 풍경 등을 속속들이 그려낸다. 시인 김명수는 동심으로 돌아가 삼라만상의 오색찬란한 사리를 캐내고 있는 것이다.

<산속 어린 새>는 올해 회갑을 맞이한 시인이 다시 한번 동심으로 돌아가 삼라만상의 뿌리를 더듬으며 이 세상의 모습을 새롭게 바라보는 동시집이다. 개구리, 몽당연필, 소금쟁이 등 시인이 어린 날에 자주 보았던 것들이 자주 동시의 소재로 나타나는 것도 실은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무분별한 대자연의 파괴와 넘쳐나는 물질문명에 대한 아이들의 손가락질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의 신문>에도 보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의 신문>에도 보냅니다.

산속 어린 새

김명수 지음, 신민재 그림,
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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