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만 가득했던 '따귀 한 대'의 교훈

말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등록 2006.01.08 11:53수정 2006.01.0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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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나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전도가 매우 불투명한 백수건달이었다. 어느 날 극장가를 어슬렁거리다가 교복차림의 한 여자 후배를 만났다.

고교 연합서클 활동을 하면서 꽤 친하게 지냈던 후배 곁에는 낯이 익지 않은 여학생이 서 있었다. 후배가 나를 선배라고 소개하자 마치 불량품을 감별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격지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고, 끝내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별 것도 아닌 일로 불끈하여 사람들이 붐비는 극장가에서 느닷없이 그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그것도 손등으로.

손등으로 친 것은 멋을 부린 것이었다.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이 죄를 씻을 수 있을까?).

그 이듬 해, 나는 거리에서 우연히 이미 대학생이 된 여자 후배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후배는 예전과는 다르게 마지못해 손끝만을 내게 맡긴 채 우울하고 생기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머쓱해진 내게 후배는 친구가 이민을 갔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민을 가다니? 가족들과 함께?"
"예, 하지만 친구는 이곳에 남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 때 그 일로 괴로워하다가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말이 나로서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머리 속에는 뺨을 후려친 내 모습만 입력이 되어 있었을 뿐, 그런 창피하고 황당한 일을 당한 여학생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행여, 그때의 일을 후회하고 반성했다고 해도 그와는 상관이 없는 나 자신만의 문제였으리라. 그만큼 나는 미숙아였던 셈이다. 나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승강장을 잘못 알고 내린 사람이 단지 그 일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하물며 백주대로에서 아무 잘못도 없이 다른 사람도 아닌 친구의 선배로부터 느닷없이 뺨을 얻어맞은 사람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아무튼 그 일은 지금까지도 내게 반면교사가 되어 어떤 경우에도 제자들에게 손찌검이나 언어폭력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한 해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한 아이를 불러다가 이런 말을 해준 것도 그 때의 일과 무관하지 않겠다.

"오늘이 방학하는 날이었으면 좋겠니?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끔찍한 일일 수도 있어. 생각해 봐. 너 올해 선생님 만나서 반장으로서 정말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런데 한 해가 다 가버렸어. 네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말이야. 그런 네 모습이 정말 싫다고 했잖아. 다행히도 열흘이 남았어. 이 열흘이 그냥 훌쩍 지나가서 오늘이 방학하는 날이라면 끔찍하지 않겠니? 희망을 가져. 힘을 내고. 알았지?"

그 말에 고무되었는지 한 번 해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간 아이가 다음날 오후 수업을 빼먹고 학교 근처 PC방에 있다가 잡혀왔다. 그쯤이야 놀랄 일도 아니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문제는 아이의 태도였다. 불과 하루 전에 한 약속을 저버린 것은 의지가 약한 탓으로 치더라도 담임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조차 없는 아이처럼 퉁명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아무리 널 이해하려고 해도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도대체 네 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는 두 시간쯤 흘렀을까? 수업 때문에 끊긴 대화를 다시 하기 위해 아이를 교무실로 불렀는데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나는 잠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내가 혹시 너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거니?"


그런 질문을 잘 했다 싶게 꾹 다물고 있던 아이의 입이 벌어졌다.

"선생님, 저 아메바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메바라니?"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제 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고요. 저 아메바 아니에요. 저도 생각하면서 살아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항변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녀석아, 넌 어떻게 선생님이 잘 해준 건 생각 않고 꼭 그런 말만 기억하니?"

그렇게 말을 해놓고 또 한참 힘든 시간이 되겠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이 저에게 잘해주신 것 잘 알아요. 그리고 어제도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했고요. 오늘 수업 빼먹고 나간 것은 솔직히 잘못했어요. 그래도 저, 아메바 아니에요."

"내가 언제 아메바라고 했다고 그래? 그래도 너에게 그렇게 말한 거 사과하마."

아이를 보내놓고 나는 괜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 한 해 동안 담임을 해놓고도 아이들을 그렇게 모르다니! 나는 아직도 교사로서 미숙아가 아닌가.

그 후 며칠이 지나 방학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나는 아이를 불렀다.

"내일이 방학인데 너 내일 하루 잘하면 일년 동안 잘한 거야. 일년 내내 잘해놓고 내일 하루 못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어. 내일 학급 잔치 준비 잘 하고 청소시간에도 반장인 네가 먼저 솔선수범해서 끝마무리 잘하도록 해라."

다음날, 반장은 청소시간에 쏟아져 나온 종이쓰레기를 분리수거함에 갖다 버리느라 추운 날씨에도 이마에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그 아이로 인해 힘겨웠던 순간들을 넉넉하게 지울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아이에게 희망을 준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내가 아이에게 해준 마지막 말은 이랬다.

"너, 지금 청소하는 모습 얼마나 눈부신 줄 아니?"

덧붙이는 글 |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조금 깁고 보탰습니다. 이 글에 소개된 후배의 친구분께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한때 제가 그랬듯이, 아직은 철없고 미숙한 제자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사랑하는 것으로 대신 죄를 씻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조금 깁고 보탰습니다. 이 글에 소개된 후배의 친구분께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한때 제가 그랬듯이, 아직은 철없고 미숙한 제자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사랑하는 것으로 대신 죄를 씻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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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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