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 나는 마초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서평]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을 읽고

등록 2006.01.08 15:34수정 2006.01.0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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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라디오에서는 슈베르트-리스트의 세레나데가 울려 퍼진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공기를 타고 공간을 넘나들며 평화로운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다. 음악을 들으며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 이어 우리시대의 인물 읽기 세 번째 편인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을 읽었다.

책에 소개된 8편의 영화 가운데 나는 <파란대문> <해안선> <섬> <나쁜 남자>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5편을 보았다. 김기덕 감독에게는 미안하지만 영화관에서는 한 편도 보지 못했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영화 채널을 통해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결같이 드는 생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놀라움'이었다.


기질적으로 그런 류의 영화는 피해왔다. 내가 영화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내 취향은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감동이 있다거나,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으므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서 머리가 띵했던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영화로만 감독을 만난 관객이라면 감독에 대해 일정 부분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주위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매우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 받는 이들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결말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김기덕 감독은 분명 특별한 존재다. 배우 서정은 김기덕 감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를 착취한다기 보다는 소외된 사람들, 편견에 휩싸인 사람들을 세상과 소통하게 하고 싶었던 거다.'

억울하게도 어느 순간 나는 여자들의 공적이 되어 버렸다. 어떤 여자들은 내 영화가 성기 중심의 마초주의라고 욕했고, 또 어떤 여자들은 저 인간 틀림없이 제 여자 몸을 팔게 할 수 도 있는 악질이라고 몰아붙였으며, 또 다른 여자들은 단 한번도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서 사랑할 줄도 모른다며 나를 가엾게 여기기도 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마초? 나는 솔직히 마초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부장적인 질서의 한 희생양인 건 틀림없는 사실인데 과연 내가 그 패배한, 쫄딱 망해 먹은 지배자를 닮고 싶어 했을까? - 본문 중에서

음악가마다 나름의 향기가 있듯이 김기덕 감독에게도 그만의 빛깔이 있고 다만 그 빛깔이 지나치게 짙을 뿐이리라. 실제로 <나쁜 남자>를 보고 극단적인 설정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가장 최근에 본 <해안선>도 마찬가지지만, 그 영화를 통해서는 배우 장동건의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웠다.

그렇게 영화로만 만나왔던 감독을 책으로 만났다. 유년 시절 제도 교육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었던 김기덕 감독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 후 그를 공장으로 보냈다.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감독은 기술을 배웠고, 어린 나이에 공장장도 되었다.


무서운 아버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했고 그곳에서 5년 간 지냈지만, 아버지의 그늘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곳이었다. 그 후 프랑스로 떠나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그리기 좋아했다던 그는 3년을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내다 마침내 귀국한다. 영화진흥공사에 응모한 시나리오 '무단횡단'이 대상을 받게 되고 그 후 감독으로 데뷔하여 첫 영화 <악어>를 만든다. 감독의 이력을 알게 된 후, 나는 그의 삶이 곧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결혼이라는 걸 했다. 아이도 있다. 그걸 노출하려고 한 적도 없지만 감추려고 한 적도 없다. 재미있는 건 사람들이 내게 결혼했냐고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지도 없고, 행색도 그렇고, 영화를 보니까 결혼했을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프랑스에 있을 때 편지로 교제했고 93년 한국에 와서 곧바로 결혼을 했다.


그것에 대해선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좀 미안하다. 내 영화의 어떤 극단적인 사랑의 이미지들이 그 사람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나도 가슴 아프다. 어쨌든 나는 이성의 감정을 탐구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극장에서 100분 동안 사람의 감정을 실어 날라야 하는 사람이라서 보편적인 사고를 가질 수 없는데, 그 사람은 정말 보편적인 사람이고 나는 그런 것들을 그 사람한테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 본문 중에서


책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김기덕 감독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평론가들이 쓴 작품론과 시나리오 무단횡단도 실려 있고, 김기덕 스스로 쓴 자신의 이야기와 평론가와 기자가 감독을 인터뷰한 형식, 배우와 스텝들이 감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인터뷰한 형식으로 책은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완성된 책이었다.

어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을 아는 것부터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보편적이지 않은 정서를 통해 감독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은 관객과 감독의 거리를 좁히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었다.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강한섭.정성일 외 지음,
행복한책읽기,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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