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성'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앙일보> "봉화 닭실마을의 '500년 손맛' 한과" 기사를 읽고

등록 2006.01.09 18:34수정 2006.01.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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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들부텀 잡수시고 난중에 너거들 입에 들어가는기라" 팽팽 돌아가는 세상, 변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중략) 며칠을 꼬박 들여 과자를 만들어 내던 정성과 여유는 바쁘게 돌아가는 요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겠지요. 기계로 찍어낸 선물용 한과 세트는 화려한 모양새를 자랑하지만, 소박한 할머니의 한과처럼 몰래 침을 삼키게 만들지는 못하더군요. 이번 주 week&은 그 옛날의 손맛을 찾아 경북 봉화 닭실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안동 권씨 집성촌인 이곳은 500년 전통의 한과로 유명하지요. 지금도 권씨 집안 며느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찹쌀을 빻고 조청을 달이며 옛 방식 그대로 한과를 만들고 있답니다. 며느리에게서 그 며느리로 반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온 닭실 한과의 맛. 그리운 그 맛을 지면 가득 담아 왔습니다. .(중앙일보 2006년 1월 7일자 기사 중에서, 이하 생략)

우리 부모님의 고향은 '닭실'이다. 새벽녘 마을을 지나는 기차 소리에 잠에서 깨어 그 기차 소리가 나를 아주 아득히 머나먼 새롭고 신나는 세상으로 데려다줄 것 같은 상상에 가슴 설레던 내 유년기의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닭실 마을'에 관한 이 기사의 서두를 읽어내려 가면서 솔직히 반가움보다는 불쾌함과 노여움이 앞섰던 건 아마도 어른이 되면서 좀 복잡해진 그곳에 대한 나의 정서와 맞닿아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의 노여움은 본질적으로 닭실마을의 한과처럼 무언가를 '변하지 않아 아름다운 정성'으로 포장하고 미화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에 관한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난 후 처음으로 부모님의 고향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유년기의 그것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아직도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들은 남정네들이 먼저 먹고 난 후 그 상을 부엌으로 물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부엌데기처럼 음식을 먹는 풍습, 끊임없이 남자들에게 숭늉, 차와 먹거리들을 나르느라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 노소를 불문하고 여자들은 끊임없이 손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일을 해 대지만, 남자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우아하게 사랑방에서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 칠순 노인이 되어도 반말로 명령하는 남편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종처럼 심부름을 하는 할머니들의 모습, 그리고 왠지 주눅 들어 보이던 딸들의 모습. 이 풍경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지극히 야만적인 느낌으로 다가왔고, 어린 시절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마을의 기억과 대조되어 함께 내 기억의 사진첩 속에 남아있다.

나이가 들면서 같은 풍경을 봐도 다른 게 보이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따뜻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간직되어 있던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에 대한 기억에 오버랩 되면서, 그곳에 대한 나의 기억과 정서는 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기자는 '기계로 만든 정성 없는 유과'보다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면서 만든 '할머니 손맛과 정성이 가득한' 안동 닭실 마을의 유과 만들기를 취재하면서, '가족들이 먹을 약과와 강정을 손수 만드는' 할머니들의 이 유과가 '핑핑 돌아가는 세상, 변하지 않아 아름다운'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물론 봉화 닭실마을 고유의 음식을 소개하고 관광지를 친절하게 안내하는 기사 내용이야 어찌 보면 나무랄 곳이 없어 보일 수도 있고, 할머니들이 모여앉아 수다를 떨며 한과를 만드는 모습에서 정겨움이 전해져 오기도 한다. 물론 몇 날 며칠 걸려 오랜 공정을 거쳐 각별한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만든 한과가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들이 여성들에게만 요구된 노동과 희생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삶을 살아야했던 내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삶의 역사가 깃들어 있기에 결코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리적으로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경상북도의 음식은 유독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이른바 '정성'을 요하는 음식들이 많다. 귀해서 제사상에나 올렸다는, 말린 명태살(?)을 하루 종일 손으로 찢어 실처럼 가늘게 만들어 버무린 음식(이름은 생각이 안 나지만)을 우리 새언니는 절대 먹지 않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유난히 그 음식을 좋아하셔서 어머니가 하루 종일 관절이 아프도록 힘들게 만드시는 걸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란다. 말린 생선을 하루 종일 손으로 찢어서 만들어봤자 접시로는 작은 접시 하나의 분량만 나오는 게 그 음식의 특성이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드시고 남은 그 귀한 음식을 조금 집어 새언니의 입에 넣어주어도 새언니는 차마 그것이 목에서 넘어가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 음식에는 어머니의 시집살이, 인생살이의 고단함이 그대로 배어있기에.


과연 이것이 '변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것일까? 그렇다. '아름다운 정성'으로 미화한 이 기사에서 내가 느끼는 노여움은 누군가를 보살피는 존재,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삶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삶의 방식이었던 우리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나의 세대의 여자들과 우리의 딸들이 '아름다운 정성'이 없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정성'은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에 각별한 정성이 요구되는 건 그것이 '가문의 영광'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소설가 이문열이 여성들을 훈계하려고 쓴 <선택>이라는 책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일 년에 제사를 수도 없이 치러야 했던 어느 명문가 종갓집 며느리가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만든 떡이 잘못되자 상심한 나머지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그 이후로 그 집안 제사에는 떡이 안 올라간다는 그런 얘기였다. 이 이야기가 우리 집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고 들려주던 친지의 얼굴에서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으로서의 뿌듯함이 살짝 묻어나왔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건 아니건 종종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으로 평가되곤 하던 '가문의 품격'을 살리기 위해선 그 집안에 '시집간' 여인들의 노동과 희생이 절대적이었다. 때로 그 품격을 위해 어떤 며느리의 목숨이 희생될 수도 있는. 닭실마을의 한과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정성'으로 미화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일 년에 수십 번씩 수십 명에 달하는 문중의 어른들을 모시고 제사상을 차려야 했던 사람들의 삶과 '그깟 떡 하나'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삶을 볼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정성'을 여자들에게만 요구하고, 여자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보살피는 존재로만 살도록 강요한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정성'이라는 찬사는 특정한 삶의 방식만을 '사랑'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불순하게 여겨진다. 그런 가족 문화 속에서 왕따를 당했던 존재들, '아름다운 정성'을 이행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여자들'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아름다운 정성'을 이행하지 않았던, 즉 '여자'의 자리를 지키지 않았던 여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했던, 죽어서 그곳에 묻히고 싶다던 경북 봉화의 고향마을. 아버지의 산소를 어디에 모실 것인가를 놓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약간의 갈등을 보이셨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그곳에 모셨지만, 아버지에게 그리움의 장소였던 그곳이 어머니에겐 고통과 눈물, 끝없이 고단하고 외로운 소외의 현장이었기 때문일까. 어머니는 최근까지도 아버지의 고향마을을 방문하는 걸 내심 내켜하지 않으셨다. 같은 여자이기 때문일까? 어머니가 자세한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어도 난 왠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이고, 할매들이 뭐 부자될라꼬 과자 만드나. 그저 공들인 만큼 과자가 잘 나오면 기분 좋고, 부러 여기까지 찾아와서 사가는 사람들 만나면 반갑고 그런기지. 더구나 조상들 제사상에 올리고 시집가는 딸네들 혼례품으로 보내는 귀한 음식인데, 욕심 부리면 쓰나."

기자는 할매들이 "누구 하나 일당을 올려달라거나 장사를 늘려보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전했다. 그런데 나는 할매들이 욕심을 부려서 할머니들의 정성과 기술, 지혜가 녹아있는 그 한과를 '정당한' 값을 받고 팔고, 욕심을 좀 더 내어 사업적으로도 성공하여 돈도 팍팍 만져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내심 해본다. 환경과 평화에 관심 있는 한 친구는 이 기사 내용을 들려주자 '닭실마을'의 한과에 제 값을 받는지에 대해 제일 먼저 궁금해 했다.

할머니들의 깊은 마음이 들어가 있는 음식이니만큼 귀한 것이기에 '아름답다'고 미화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대로 값을 매겨주고 평가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또한, 대량생산이 가져오는 문제점들, 제대로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고민들은 사회구성원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할 몫이지, 그것이 여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 고장 특유의 음식 문화 발전을 위해서 남녀 모두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함께 한과 만들기에 참여하여 그 전통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할머니들의 오랜 기술과 지혜, 깊은 마음이 담겨져 있는 한과는 분명 가치가 있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제대로 먹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음식을 먹는 이들에 대한 진심과 섬김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친구의 지적처럼 '제대로 먹고 사는 것'은 남녀 모두를 포함한 구성원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하고 실천해야할 문제라고 본다. 특정 집단의 희생을 전제한 찬양과 미화가 빠지기 쉬운 함정만 없다면, 할머니들의 깊은 맛이 담겨있는 닭실 한과는 내 입에도 진정 맛있는 음식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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