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터진 살을 꿰매는 시

마경덕 첫시집 <신발論>을 읽고

등록 2006.01.15 08:35수정 2006.01.1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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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마경덕 시인의 첫 시집 <신발論>(문학의전당)이 나왔다. 독특한 이름으로 시집 제목이 된 <신발論>은 그의 신춘문예 당선작인데, 당시 2003년도 신춘문예 당선작 가운데 문단에서 가장 크게 주목을 받은 작품으로 기억된다.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 <신발論> 전문


마경덕 시인의 첫 작품 <신발論>은 신선한 일기체 형식과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 역전 그리고 이미지 계열체 시어 구사로 시적 논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거기에다 신산(辛酸)한 세상살이의 힘겨움 속에서 얻은 반성적 사유가 내장되어 있다.

그의 시를 두고 “우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고 힘이 있다. 시를 가지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터득하고 있는 시들이다”라고 한 심사평이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다.


나는 마경덕의 첫 시집 <신발論>을 두고 “슬픔이 몸을 찢고 나온” 그러나 분명하고 힘 있는 시, 라고 명명(命名)하고 싶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시의 제재로는 흉터를 가지고 있는 골목(「누군가 골목을 건너갔다」), 정기휴일 사연 많은 시장 사람들로 가득 찬 불가마 사우나탕(「불가마 사우나탕」), 뻣뻣하게 쇠어버린 슬픔이 몸 밖으로 빠지지 않는 노망난 할망구(「울음주머니」), 세 번이나 도굴당한 내 몸(「단호박 자궁」), 링거를 꽂고 있는 병든 노모(「소나무」), 문 닫은 공장의 쓸쓸한 굴뚝(「굴뚝」), 쪼그라진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무꽃 피다」), 까만 고무판으로 다리를 휘감고 두 팔로 바닥을 헤엄치는 사내(「건널목에서」), 청계천 하류로 떠밀려 온 술고래들(「고래는 울지 않는다」)인데,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달픈 삶의 국면을 거짓 없이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를 두고 문학평론가 김종태는 “난해하지 않으나 깊고 따뜻하여 언제나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누추한 이 세계의 모습을 애틋하게 껴안는다”고 평하고 있다.

힘찬 아래의 시를 보면서 우리는 힘겨운 삶의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푸른 생의 의지를 읽을 수도 있겠다.

몸통만 남은 플라타너스
머리 위 전선을 비집고
막무가내 뭉툭한 모가지를 디민다

퍽퍽, 맨몸으로 허공을 들이받는
저, 저, 가지 끝
짐승 냄새가 난다

나무는 지금
터진 살을 꿰매는 중,
- 3월, 플라타너스 부분


역동적 상상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마경덕 시인은 고달프고 누추한 현실의 삶을 외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퍽퍽, 맨몸으로 허공을 들이받”으며 제 길을 가겠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터진 살을 시적 언어로 꿰매고 있는 수도승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시론(詩論)을 대변하고 있는 '시인의 기도'에 나는 함께 손을 모으고 또 박수를 보낸다.

하느님.
저, 복 주지 마세요

많은 재물과 넘치는 친구를 주시면
필경, 시간을 탕진하며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제 영혼을 목마르게 하소서
쉬지 않고 물을 찾아 헤매이게 하소서
이 팍팍한 세상에
좌절과 슬픔의 힘으로,

다행히 저는 시를 씁니다

행여 복 주시 마세요. 하느님.
- '시인의 기도'전문

신발論

마경덕 지음,
문학의전당,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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