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틈 선창' 사라지고 '대대포구' 생겨나다

김학수의 <순천만과 사람들 14>

등록 2006.01.17 10:26수정 2006.01.1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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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틈 선창' 흔적은 사라지고


a 순천시 대대동 '대대포구' 전경

순천시 대대동 '대대포구' 전경 ⓒ 김학수

순천만의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는 대대포구가 1946년경 만들어지기 전까지 순천 대대동에는 '돌 틈 선창'이라는 포구가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은 물론 그 형태를 찾을 수 없다.

a 순천시 대대동'서영우'(77)옹

순천시 대대동'서영우'(77)옹 ⓒ 김학수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동안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순천만 사람들과 함께 존립해 오다가 역사와 세월의 흔적 속으로 사라져 버린 순천시 대대동의 '돌 틈 선창'과 그 이후 새롭게 생겨난 '대대포구'의 이야기를 서영우(77)옹의 구술로 상기해 보도록 하자.

a 모습이 사라져버린 '돌 틈 선창'터

모습이 사라져버린 '돌 틈 선창'터 ⓒ 김학수

발원지에서 시작해 이사천을 지나 순천만으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지나가는 곳, 대대마을 어귀에는 예전부터 포구가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의 인안 양수장 근처에 있었다는 '돌 틈 선창'의 규모는 작은 고깃배와 순천만 탐사선만이 오고가는 현재와는 다르게 200톤 급 화물선이 들고날 정도로 규모가 큰 선착장이었다.

a '돌 틈 선창'으로 연결된 물줄기가 제방 둑을 쌓으면서 절강(切江)되었다.

'돌 틈 선창'으로 연결된 물줄기가 제방 둑을 쌓으면서 절강(切江)되었다. ⓒ 김학수

일제시대 순천 교량마을에는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이곳 '돌 틈 선창'을 이용하여 생활필수품을 운송하기도 했으며 대대마을 4~5가구가 우마차를 이용하여 이들의 짐을 실어 나르는 일에 종사했었다.

지금의 인안 방조제가 완공되기 이전인 1942~1943년 경에 일본인에 의해 대대마을 앞 제방이 만들어지고 간척지가 생겨났는데 이곳이 대대마을 앞에 위치한 '중원 뜰'이다. '중원'이란 당시 일본인의 이름인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이곳 농경지를 '중원 뜰'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중원 뜰을 만들기 위한 제방작업과 돌 틈 선창의 수로를 정비하는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하는데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공사를 중단하고 이곳을 떠나게 되면서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중원 뜰 일대가 바닷물에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후 순천시에서 하천 정비사업을 하면서 제방의 둑을 높이는 공사를 하였는데, 둑을 쌓으면서 돌 틈 선창으로 연결되었던 물줄기가 절강(切江)되면서 돌 틈 선창은 역할을 잃은 채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옛날 이곳이 선창이었다는 흔적으로 몇 무더기 돌만이 강가에 자리하고 있고 예전 발원지에서 시작해 동천과 이사천을 거쳐 돌 틈 선창과 대대마을을 지나 순천만으로 흘러갔을 강줄기마저 하천 정비사업으로 인한 절강으로 고고한 흐름을 멈추고 있다.

'대대포구' 새롭게 태어나다

a 1956년 서영우(77)옹의 결혼사진. 서있는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대대포구 개설자인 故서정태氏

1956년 서영우(77)옹의 결혼사진. 서있는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대대포구 개설자인 故서정태氏 ⓒ 서영우

대동아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지금의 대대포구 자리에는 조그만 선창이 있었다. 서영우(77)옹이 15~16세 때 당시 소학교를 졸업하고 청년 훈련생으로 (자동)편입되어 생활하고 있을 무렵 선친의 4형제 중 막내 숙부인 故서정태氏가 평양 징용에서 돌아와 대대포구 선창가에서 주막(현 대대 선창집)을 운영하였다.

a 1984년 대대포구의 모습

1984년 대대포구의 모습 ⓒ 서영우

이후 해방이 되고 징용에 끌려갔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공출로 곡식을 빼앗겨버린 우리의 농촌 살림은 배고픔의 나날이었다. 여자만 일대 지섬 사람들이 잡은 고기를 육지에 내다팔기 위해 대대선창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당시 주막업을 하고 있던 故서정태氏가 이들의 생선을 어판해주면 ('서영우'옹은 소사업무)마을 사람들이 어판된 생선을 받아다가 낙안면, 쌍암면, 주암면, 송광면 일대로 장사를 다녔다고 한다.

차츰 장사꾼이 몰려들고 포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자 故서정태氏가 마을의 인부들을 동원하여 용산(용머리 산) 일대에서 바위를 채취하여 대대포구의 형태를 만들었다 한다.

여수-순천 간 신작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5~6년 동안 대대포구는 고기와 곡식을 사고파는 물류 중심지로 톡톡한 역할을 했다. 신작로가 놓이고 화물차가 다니기 시작하고 여자만 일대 지섬에서 순천 대대포구까지 생선을 팔러 다니던 뱃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자 대대 사람들은 2~3년 동안 불황을 맞았다.

불황이 계속되던 중 순천시내에 '보해'소주공장이 들어서면서 대대포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소주의 원료로 사용하는 말린 고구마 (이곳 사람들은 '빼깽이'라고 부름)를 각 지섬에서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120톤 급 화물선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많은 대대 사람들이 화물 하역작업에 종사를 하였다고 당시 작업반장 업무를 맡았던 서영우 옹은 말한다.

a 포구가 정비되기 이전의 대대포구.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포구가 정비되기 이전의 대대포구.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 서영우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보해'소주공장이 순천에서 문을 닫게 되자 또다시 대대포구는 할 일을 잃게 된다. 불황과 호황은 연속된 반복활동을 거치면서 대대포구와 대대사람들의 생활 리듬을 뒤흔들었다.

부산-순천까지 생필품(비료 기름 등)을 운송하던 화물선이 쌀과 순천에 있는 재재소(당시 순천에 4~5개의 재재소가 있었다)에서 생선을 담는 '어상자'를 만들어 대대포구에서 화물선을 이용하여 운송하곤 했는데 이마저도 남해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무산되어 버렸다. 차로는 한나절도 안 되는 거리를 뱃길로 2,3일씩 위험을 감수해가며 다닐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a 1984년 당시 대대포구 전경. 꼬막껍질 등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1984년 당시 대대포구 전경. 꼬막껍질 등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 서영우

희망이 없는 듯 살아가고 있을 즈음 광양에 살고 있다는 '서한백'씨와 '김ㅇㅇ'라는 사람이 꼬막 양식 신기술을 가지고 대대포구를 찾아왔다. 순천만 일대에서 꼬막 양식업이 최초로 시작된 시기다. 다행히 꼬막 종표를 부착하고 나서 근 10여 년 동안 순천만 일대의 꼬막 양식업은 대성공을 이루었고 꼬막 선별과 배송을 담당하였던 서옹과 대대 사람들의 업무도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맞춰 여수 수협 '대대 어촌계'(지도과장 김재식)가 설립된다. 당시 여수수협 임직으로 근무하였다는 서옹의 구술에 의하면 당시 여수수협에서 사용했던 선창이 지금도 대대포구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여수수협 선창을 '윗 선창', 서옹 숙부인 故서정태씨가 만들었다는 선창을 '아랫 선창'이라 부른다.

현재 잘 정비되어 있는 대대포구의 모습은 1997~2005년 까지 대대 어촌계장을 역임한 '김대우'씨가 국고 보조금을 받아 대대포구 부두 정비사업으로 완공하였다.

a 1984년 대대포구의 전경

1984년 대대포구의 전경 ⓒ 서영우

10여 년 동안 꼬막 양식업이 호황을 누렸으나 수협과의 수수료가 문제가 되면서 양식업자들이 대대포구로 꼬막 반입을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대대포구에서 선별작업과 배송작업이 중단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또다시 대대포구는 어두운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제 순천만을 가슴에 끼고 있는 대대포구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순천만이 습지보호구역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순천만과 대대포구를 찾고 있다. 지난날 수많은 세월동안을 불황과 호황 속에서 울고 웃어야 했던 대대포구가 또 다른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작가 김승옥은 23세 때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대대포구를 '안개나루'라고 표현했다.

a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의 무대가 된 안개낀 대대포구와 이사천 수로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의 무대가 된 안개낀 대대포구와 이사천 수로 ⓒ 김학수

그 대대포구 안개나루에 '무진교'라는 보행교각이 순천만 갈대숲길 속에 어우러져 있다. 새벽안개 속에서 아직 이슬을 털어내지 않은 채 우뚝 서 있는 갈대 숲길 사이로 유유히 탐사 유람선이 오가며 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갈대의 이야기가 시(詩)가 되고 철새들의 노랫소리가 음악이 되는 자연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순천만 대대포구의 미래가 아침 안개 속을 헤치고 올라오는 밝은 태양처럼 붉게 타올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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