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48회

등록 2006.01.17 08:28수정 2006.01.1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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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이 이장 정도 되는 원형의 석실이었다. 천정에는 큰 야명주가 달려있어 실내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석실 안에서 유난히 시선을 끄는 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운 여인의 나상이었다.

완벽한 나신(裸身)의 석상(石像). 아니 언뜻 보기에는 석상 같았지만 석상이 아니었다. 도자기를 구운 것과 같이 점토로 빚어 구워 만든 것이었다. 유약까지 발라 구웠는지 은은한 색깔의 피부마저도 탄력 있어 보였고, 너무나 정교하게 만들어져 실제 살아있는 여자의 나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사선으로 늘어진 나삼은 얇고 투명하여 벌거벗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저렇듯 여인의 몸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도공(陶工)이라면 아마 중원에서도 찾기 힘들 터였다. 더구나 상(像)임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욕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유항(柔姮)이네. 넷째이지. 특이한 체질을 가진 여인으로 교내의 의식을 거행하는 천사장의 역할을 하는 기녀(奇女)라네.”

한 동안 담천의가 바라보자 옆에 있던 백결이 설명했다. 연동에 들어와 여러 가지 상들 사이에서 유독 저 여인의 상을 두세 번 보았던 것 같았다. 비스듬히 앉은 자세가 있는가 하면 손을 위로 쭉 뻗은 듯한 모습도 떠올랐다. 왜 저 여인에 대한 상을 곳곳에 여러 개 세워 놓았는지 모르지만 영 신경이 거슬렸다.

“상(像)만으로도 지독한 염태(艶態)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지독한 염혼공(艶魂功)이나 요공(妖功)을 익힌 것 같구려.”

“마음에 드는가? 하지만 아쉽게도 저 여자는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셋째사제의 처(妻)라 할 수 있네. 이미 임자가 있다는 말이네.”


“저 여자는 내 취향이 아니오. 더구나 나는 색목인을 좋아할 정도로 호색(好色)하지도 않소.”

담천의의 무뚝뚝한 말에 백결이 씨익 웃었다.


“농담이었네. 그런 것 같고 정색을 하기는....”

담천의 역시 백결을 보며 씨익 웃었다.

“농담인지 알았소. 헌데 이제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오?”

도중에 치명적인 기관과 진식으로 잠시 고생은 했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은 먼저 진입한 무림인들의 흔적으로 비교적 편하게 온 셈이었다. 하지만 점차 깊게 진입할수록 동굴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매우 복잡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사람이 서서 가까스로 지나칠 수 있는 원형의 입구가 세 개나 뻥 뚫려 있었다. 헌데 자신을 바라보는 담천의를 보며 백결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세하나마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나도 모르네. 이곳은 나 역시 처음 와보는 곳이네.”

“길을 잃었단 말이오?”

“이미 반 시진 전부터 그랬네. 이곳은 너무나 많이 바뀌었고, 없었던 동혈이 어떻게 갑자기 이리도 많이 생겼는지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네.”

담천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백결을 바라보자 백결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는 자신 없는 말투로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전해들은 말이지만 이 연동은 만들 때부터 이상한 사건들이 있었다네.”

본래 연동은 천마곡에 백련교도들이 갇히기 시작하면서부터 탈출로를 만들기 위해 파들어 갔던 동굴이었다. 그러다 중간에 천연동굴을 발견하면서 쉽게 탈출로를 확보하게 되리란 기대를 가지게 하였다. 무공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낸 시기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허나 그러한 기쁨도 잠시였다. 이상한 일은 탈출로 작업을 하다가 최초로 천연동굴을 발견했던 인물들 사십여 명 중 삼십여 명이 사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죽은 채 발견되었고, 나머지 십여 명은 홀연히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자 백련교도 중 몇 명이 다시 그 원인을 밝혀내고자 천연동굴로 진입해 조사에 들어갔지만 그들 역시 시체로 발견되거나 실종되자 그 이후로 천연동굴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동안 탈출로를 찾는 작업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다른 곳을 뚫으려 했지만 시간이 너무 걸리자 어쩔 수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고수들이 다시 천연동굴로 진입했네. 역심단공(逆心丹功)으로 무공을 회복한 지 사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지. 다행스럽게도 처음에는 그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그들은 조심스럽게 삼년에 걸쳐 입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천연동굴이라고 했지만 분명 누군가가 들어와 다닌 흔적이 있었고, 그 입구가 바로 오래된 사당이었다는 점이었다. 입구의 석문 역시 분명 누군가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정녕 뭔가 비밀이 있는 동굴이었다.

“동굴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지. 탈출로를 찾는 본 교의 비밀이 새어나가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네. 헌데 그 와중에서 또 다시 여섯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네. 네 명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두 명은 실종되었지.”

시체를 회수해 사인(死因)을 조사했다. 긁힌 상처 외에는 외상도 없었고 그렇다고 피를 토하거나 다른 흔적을 보이지 않아 내상을 입은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동공이 풀려있었고, 무언가에 홀린 듯 넋을 잃은 상태에서 기력이 탈진해 있었다. 정녕 괴사(怪事)였다.

“오랜 조사 끝에 결론이 내려졌지. 사인은 질식이었네. 누가 목을 조른 흔적도 없었음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질식해서 죽었다네. 그들은 미로와 같은 동굴 안을 헤매다가 공기가 희박해지면서 질식해 죽은 것이었네. 이 동굴을 조사한 인물들의 입에서 한결같이 이 동굴이 너무나 괴이해 사람을 미혹(迷惑)시킨다는 의견도 그런 결론을 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네.”

질식사(窒息死)한 것은 분명했다. 더구나 한결같이 지친 상태에서 죽은 것이 확연했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도출해 낼 수 없었다.

“그 뒤로 출입로 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목재로 동굴들의 입구를 대충 막아 놓았지.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것들이 모두 치워져 있는 상태란 말이네.”

백결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드나들던 연동이 아니었다. 만약 무림인들이 들이닥치면서 입구를 막고 있던 목재들을 부수거나 치웠다면 그 잔재라도 남아있어야 정상이었다. 허나 전혀 그런 흔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누군가가 동혈의 입구를 막고 있던 목재를 깨끗하게 치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마저도 길을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분명 이 동혈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사형제 중 누군가가 풀어낸 것일까?

이미 이곳을 지나간 지 이년이 다 되어가는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얼마 전에 이곳을 지난 강명이나 전월헌은 이렇듯 복잡한 곳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누군가가 안내를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나간 뒤에 이리 만들어 놓은 것일까?

“이제는 감으로 길을 찾아야 하겠구려.”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담천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인간의 방향감각이란 것도 이러한 동굴 깊숙한 곳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담천의 뿐 아니라 백결 역시 막막한 느낌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노력은 해야 했다. 백결은 동혈의 입구마다 세심하게 살폈다.

“이곳에서 있던 무림인들이 두 갈래로 흩어진 것 같네. 가운데 있는 동혈로 대부분 진입한 것 같군. 일단 따라가 보는 것이 어떤가?”

“소제에게 뭐 뾰족한 수 있겠소?”

담천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가운데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가운데 입구로 들어가려는 백결을 향해 짧게 말했다.

“잠시 멈춰보시오.”

가운데 입구로 들어가다 말고 담천의의 말에 백결이 몸을 돌렸다. 담천의는 무언가 기척을 느꼈는지 서서 검미를 치켜뜨며 청각을 최대한 집중시키고 있었다. 미약하지만 불규칙한 숨소리가 어디선가 들리고 있었다.

(사람이 있다!)

담천의는 눈짓으로 오른쪽 입구를 가리켰다. 동시에 그의 몸은 빨려 들어가듯 오른쪽 입구로 들어갔다. 백결이 무슨 일인지 몰라 의아스런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뒤따랐다. 그 동혈은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더구나 동굴이 점점 좁아져 겨우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앞서 걷는 담천의 걸음걸이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십여 장을 나아갔을까? 동굴은 더욱 좁아져 허리를 구부려야 앞으로 나아갈 정도였다. 하지만 불규칙하게 들리던 숨소리는 더욱 또렷해졌고, 희미하나마 오장 여 앞에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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