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에게 선행 베풀자 콩농사 더 잘 돼

들짐승과 상생하는 미덕을 지닌 농사꾼, 김규복씨

등록 2006.01.18 12:39수정 2006.01.1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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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콩과 수수 농사를 짓고 있는 셋째 형 김규복씨

콩과 수수 농사를 짓고 있는 셋째 형 김규복씨 ⓒ sigoli 고향

아버지가 동네에서 고라니고기 잔치를 벌이고 난 후 끔직한 일이?


어릴 적 고향 산과 들에는 사자, 호랑이, 표범, 코끼리나 고래, 물개 따위를 빼고는 야생조수가 종류별로 거의 다 있었다. 멧돼지는 예나 지금이나 자주 출몰한다. 그러니 굳이 아까운 돈을 허비하며 도시까지 나가 동물원 구경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진한 갈색 노루와 고라니는 사슴과다. 수컷 노루가 조금 크고 뿔이 있는 점이 약간 다를 뿐 내겐 거의 동일한 존재다. 고라니와 노루가 수도 없이 많았다. 특히 겨울엔 빈 들판으로 유유히 지나가는 두 짐승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누렁개에 쫓겨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별 것 아닌가 싶기도 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마을 앞에서 지켜보다가 내를 건너고 논두렁을 넘어 살금살금 다가가 직접 고라니 뒤를 쫓느라 친구와 함께 1km는 족히 뛰기도 했다.

a 고라니와 엎치락 뒤치락 경주를 하던 우리집 누렁이가 가끔은 토끼와 꿩도 잡아온다.

고라니와 엎치락 뒤치락 경주를 하던 우리집 누렁이가 가끔은 토끼와 꿩도 잡아온다. ⓒ sigoli 고향

40년 전 동네에선 고라니를 잡았다고 집집마다 사람을 불렀다고 한다. 고라니 맛은 '쇠고기 세 근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참새고기'나 멧비둘기에 견줄 만큼 부드럽고 특이해서 남정네들은 꿩, 토끼, 오소리, 개구리와 함께 겨울철 별미 중 두 번째라면 서럽다고 한다.

그만큼 고기 맛 아는 사람은 꼭 한번 먹어보고 싶어 한다.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나는 여전히 상상 속에만 남아 있다. 오늘도 소갈병 걸린 듯 구미를 당기고 있으니 누가 내게 속여서라도 그 맛을 한번 보여 달라.


그날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머니 몰래 노루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댁으로 가셨다고 한다. 미신 때문에 펄쩍펄쩍 뛰는 어머니가 알았을 경우엔 뒤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니 개고기 한 점을 먹을 때처럼 쉬쉬하며 다녀오셨다.

토끼 한 마리로도 대여섯 명이 소주 대병을 서너 개는 비웠을 터인데 그보다 대략 다섯 배나 큰 먹잇감을 놓고 남자들은 시끌벅적하게 고기 맛을 즐기고 노랫가락까지 한 곡씩 뽑았으리라. 아버지는 날이 저물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와 짐짓 태연한 척 하셨다고 한다.


a 그렇게 맛이 좋다던 참새구이. 사실 참새와 꿩, 토끼는 무를 두껍게 채 썰어서 간장과 참기름에 달달 볶듯 짤박하게 끓이면 더 맛있다.

그렇게 맛이 좋다던 참새구이. 사실 참새와 꿩, 토끼는 무를 두껍게 채 썰어서 간장과 참기름에 달달 볶듯 짤박하게 끓이면 더 맛있다. ⓒ sigoli 고향

그런데 다음날 믿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두 살배기 셋째형 오른발이 삐딱하게 안쪽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멀쩡하던 다리가 난데없이 기형이 되고 말았다. 의학적 진단은 애초에 생각도 않던 할머니와 어머니는 진원지를 찾기에 이른다.

어머니는 곧 마을에서 고라니고기를 먹었다는 첩보를 접하고 아버지와 대판 싸웠다. 그 날 오후엔 할머니는 나를 업고 그 집에 가서 "그토록 맛있으면 두고두고 조용히 먹을 것이지 뭐하려고 남의 서방을 불러내 아이가 이 모양이 되게 했느냐?"고 따졌다고 한다.

결국 올해 나이 마흔둘인 삐딱이 셋째형은 거동에는 큰 불편함이 없지만 발을 질질 끌어 한쪽 발이 안쪽으로 굽었다. 지금도 신발이 한쪽은 멀쩡한데 나머지 한 짝은 땅에 끌리는 바람에 이내 떨어지고 만다. 누구든 유심히 보지 않으면 정상인 걸로 여기기 일쑤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자랄 적에 철석같이 믿는 신념을 우리에게 따르도록 했다. "남의 것 넘보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치셨고 "살아 있는 날짐승은 절대 집으로 가져오지 말라. 집으로 들어온 산 짐승은 반드시 내보내야 한다"며 살생을 금지하다시피했다.

그 중에서도 영물(靈物)이라 여기던 "고라니와 노루는 '절대로! 결단코! 어떤 일이 있어도!' 먹지 말라"고 힘주어 경고하셨다.

a 형이 직접 수확한 메주콩 가격이 하락해 농사 잘 지어놓고도 울상이다.

형이 직접 수확한 메주콩 가격이 하락해 농사 잘 지어놓고도 울상이다. ⓒ sigoli 고향

글쎄 숙적, 노루가 뜯어먹어서 콩 농사가 더 잘 된답니다

그런 형이 어린 시절을 잘 넘겨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 생김새도 우락부락하지 않을 뿐 남자답다고 해도 상관이 없겠다. 어머니 심성을 닮았는지 농촌에 사는 형은 닭 한 마리도 직접 잡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지녔다.

20대 초반을 서울 공장에서 일하다가 귀향하여 나무농사를 하다가 몇 년 전부터는 콩 전문농사꾼으로 변신했다. 수만 평에 묘목을 심다가 아주머니 인부들이 해마다 고라니 새끼를 잡았다고 한다. 오전에 잡혀 풀어주면 오후에 다시 내려왔다.

사람들은 형에게 "영감 보약해줄텡게 주라"고 사정을 하더란다. 들은 체 만 체 매번 아주머니들 몰래 고라니를 풀어주었다. 콩 농사를 하던 지난 4년 전부터도 산자락에 잇닿아 있는 밭으로 고라니 발길이 잦았다. 마찬가지로 할머니들에게 붙들려 나무에 묶여지기도 하고 가방에 담겨 있기도 했지만 보이는 족족 놓아주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을 베푼 결과 해마다 다른 사람들 콩은 적은 양을 심어 애지중지 키워도 죽정이거나 수확이 거의 없었다. 콩이라면 먹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형은 날씨와 땅을 가리지 않고 다수확을 거둔다.

비결이라면 남들보다 1~2주 지나 심는다는 것과 예초기로 콩이 원줄기가 자라다가 가지를 치기 시작하면 남들이 "그러다가 콩 농사 망치지"라고 해도 아랑곳 않고 잎과 줄기를 거의 바닥까지 잘라버린다.

늦가을에 거둬들여 보면 언제나 형은 예상치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다. 작년엔 한 해는 잘 되고 다음 해는 망치기 일쑤인 속이 푸르스름한 검정콩을 포함해 7, 8톤을 생산했다.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고라니가 도와준 걸까?

"그것들이 뜯어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우리 콩은 걔들이 뜯어 먹으니까 더 잘 돼야. 넘들은 콩잎 뜯어먹는다고 덫도 놓고 깡통도 흔들리게 하고 허수아비도 만들어. 면적이 좁다보니까 그렇게라도 건질 욕심인가 본데 그러다보면 콩잎이 무성해져서 열매가 안 맺히거든. 내껀 나도 몇 만평인지도 모르고 밭이 여러 군데 있으니까 관리하기도 힘들잖아. 그래서 뜯어먹든 말든 냅두는 것이여. 그래도 내 것이 더 낫잖아."

이태 동안 콩 농사를 지어보니 딱 맞는 이야기다.

a 콩은 뿌리혹박테리아가 공기 중 질소를 빨아들여 줄기와 잎이 무성해지므로 자란다 싶으면 꽃이 피기 전까지 마구 잘라내는 게 수확이 훨씬 많다. 고라니가 제 구실을 한 셈이다.

콩은 뿌리혹박테리아가 공기 중 질소를 빨아들여 줄기와 잎이 무성해지므로 자란다 싶으면 꽃이 피기 전까지 마구 잘라내는 게 수확이 훨씬 많다. 고라니가 제 구실을 한 셈이다. ⓒ sigoli 고향

고라니에게 당한 설움, 고라니에게 선행을 베푸니 이런 일도 있는가 보다. 참으로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구석이 많다. 콩잎을 뜯어먹었기 때문에 더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썩 괜찮아 보인다.

농사를 지으면 도인이 되는 걸까? 마냥 들짐승을 내칠 일도 아니다. 콩이 베게 심어졌으면 비둘기와 꿩이 찾아와 드물다 싶게 솎아주기까지 하면 그해 농사는 더 잘 되었다.

얼마 전 남부지방에 기러기가 떼로 몰려와 보리를 뜯어먹었다고 언론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지만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뿌리만 살아 있으면 금방 치고 올라와 더 튼튼하게 크도록 웃자람 방지 효과를 누렸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a 작년에 처음으로 속이 파란 콩을 심어 실패하지 않았단다. 화순 동면에 가면 흑두부 맛이 끝내준다.

작년에 처음으로 속이 파란 콩을 심어 실패하지 않았단다. 화순 동면에 가면 흑두부 맛이 끝내준다. ⓒ sigoli 고향

덧붙이는 글 | 콩이 필요하신 분은 제 형인 김규복씨(011-9624-5549)에게 직접 연락 바랍니다. 김규환 기자는 인터넷고향신문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콩이 필요하신 분은 제 형인 김규복씨(011-9624-5549)에게 직접 연락 바랍니다. 김규환 기자는 인터넷고향신문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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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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