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못해!"

등록 2006.01.26 22:00수정 2006.01.2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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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동안 미루었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오랜만에 외출하게 되었습니다. 기왕 집을 나서는 참에 한꺼번에 일을 다 처리하고 돌아오면 대단히 홀가분할 것 같았습니다.


아침 설거지를 하는 아내에게 동행을 요청했지요. 아내는 혼자 다녀오라며 칼로 무 자르듯 매정하게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실망이었습니다. 아내와 단 둘이 사적(?)인 일로 외출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고 졸랐더니 아내는 못 이기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a 아내와 산행 길 약수터에서.

아내와 산행 길 약수터에서. ⓒ 박철

"그럼 맛있는 점심 사주라."
"맛있는 게 뭔데?"
"돈가스!"
"좋아."

방학이라 집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시간을 축내고 있는 아이들도 우리 내외의 외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였습니다. 전 같았으면 같이 가겠다고 신발 들고 먼저 따라나섰을 텐데, 이제는 별로 반응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몰고 해운대 방향으로 달렸습니다. 모처럼의 드라이브라 아내도 기분이 괜찮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그러자 자동차 실내 안의 분위기는 꽤 삼삼했습니다. 해운대 목적지에 도착해서 일사천리로 볼 일을 보고, 이제 망미동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두 번째 처리해야 할 일은 모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방송되는 칼럼 한 달치를 녹음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날따라 전혀 헤매지도 않고 방송국까지 수월하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기분이 더 '업'될 수밖에요. 그런데 차에서 막 내리려고 하는데, 아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초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 방송 원고는 가지고 왔우?"
"뭐라고?"

아뿔싸! 차 안에는 그 어디에도 방송원고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나설 때 분명히 원고를 챙겼는데 원고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킬킬 웃으며 나의 건망증 발작에 부채질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그래 정신을 어디다 두고 방송국에 녹음 하러 온 사람이 원고를 집에 두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내가 분명히 원고를 챙겼는데 당신이 꾸물거리는 통에 내가 깜박하고 원고를 두고 온 모양이네. 하는 수 없지 뭐. 내일이 마감일이니 내일 와서 하면 되지 뭐.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겠소?"

그러자 아내의 입이 찰나지만 비뚤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말했겠지요. '남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선 꼼꼼한 사람이, 제 실수나 잘못에 대해선 너무 관대한 거 아냐?'

이제 다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서면 쪽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남의 실수나 허물에 대해서 좀 더 너그럽게 대하면 얼마나 인간관계가 부드럽고 따뜻해지겠는가?'

a 방송국에서 녹음을 마치고

방송국에서 녹음을 마치고 ⓒ 박철

"여보, 오늘 큰 맘 먹고 그동안 미루었던 일을 쌈박하게 처리하고 당신하고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계획이 조금 틀어졌네."
"그게 남자들의 한계예요. 여자들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남자들은 그게 안 된다는 걸 모르셨어요."
"그럼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이군. 그래서 여자들은 그만큼 복잡한 것인가?"

방송국에서 녹음하는 일 말고 모든 일을 끝내고 동네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습니다.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그것도 평양식 비빔냉면이…. 집에서 나설 때 아내에게 돈가스를 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내가 자주 냉면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아내도 마지못해 그러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냉면집에 앉아서 냉면을 꾸역꾸역 입에 넣으면서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엇이든지 내 위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뿐만 아니라,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아니겠습니까? '여보, 미안하오. 내일은 틀림없이 돈가스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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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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