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청빛으로 시 읽기에 눈뜨다

김현자 문학평론집 <아청빛 길의 시학>(소명출판사, 2005)

등록 2006.01.29 14:51수정 2006.01.2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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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김현자의 새 문학평론집 <아청빛 길의 시학>이 소명출판사에서 나왔다. 문학평론가 김현자는 19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아청빛 언어에 의한 이미지'가 당선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한국시의 미적 거리>(문학과지성사,1997), <한국 여성 시학>(깊은샘,1997), <한국 현대시 읽기>(민음사,1999) 등이 있다.

아청빛이란 어떤 빛(色)을 말하는가? 저자가 30년 전 문단에 첫발을 내밀며 제출한 평론에도 아청빛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걸 보면 꽤 이 아청빛에 매료되어 있는 듯하다.


아청(鴉靑)은 흔히 '야청(野靑)'이라고도 부르는데, 검은 빛을 띤 푸른빛을 두루 나타내는 명사다. 그러니까 아청빛은 선명하지 않고 어슴푸레한 해질녘의 검푸른 빛깔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아청빛은 김현자의 평론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의 맑고 순결한 내면(영혼)을 들여다보는, 읽어내는 빛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한 시인의 순결한 젊은 영혼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눈부신 순수의 빛깔"이기도 하다. 평론집 2부에 있는 평론 '아청빛 이미지와 화해의 시학'이 그것이다.

시인론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2부에는 그 외에 '사랑의 양면성과 아니마적 몽상의 세계-김소월론' '경계공간과 상생(相生)의 거리두기-서정주론' '틀 지우는 모든 것들에 대한 무심(無心)의 낙천성-천상병론' 등의 여러 명편(名篇)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현자의 섬세한 안내로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여러 시인들의 다채로운 마음의 무늬 결을 들여다보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서정시의 순정한 힘"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3부는 '여성시의 존재론적 심연'이라는 이름으로 김일엽, 김후란, 허영자, 신달자, 김영교, 이사라 등의 시 세계를 다루고 있는데, 한국 여성시사의 소중한 학문적 탐구이다. 그리고 4부 '시간의 자취와 상징의 숲'은 주제를 중심으로 한 한국시의 정서와 특성을 모색한 글이다.


필자가 제일로 관심이 가고 집중 심취해서 읽은 곳은 '날실과 씨실의 시선, 텍스트 자세히 읽기'라는 이름이 붙여진 제1부의 글들이다.

김광규의 '크낙산의 마음', 이수익의 '방울소리', 김승희의 '달걀속의 生 5',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김명인의 '안정사', 정현종의 '나방이 풍경을 완성한다'라는 6편의 시를 그야말로 정교하고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책머리에'에서 "쓰는 자와 읽는 자의 내밀한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작품이 작품으로 살아난다는 것은 문학을 대하는 나의 신념이자 방법론이기도 하다. 하나의 작품을 치밀하게 읽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열리는 언어 바깥의 무한한 세계를 내보여주고 싶었다"고 적고 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나방이 풍경을 완성한다'를 분석하고 있는 글 '풍경으로 태어나는 생(生)의 아름다움' 몇 군데를 인용해 본다.

넓은 창
바깥
먹구름떼
쏟아지는 비
저녁빛에 젖어
큰바람과 함께 움직인다.
그렇게 싱싱한 바깥
그 풍경 속으로
나방 한 마리가 휙 지나간다
- .

나방이 풍경을 완성한다!

- '나방이 풍경을 완성한다' 전문.

"이 시는 두 연으로 구성되고 있지만, 의미론적으로는 네 부분으로 세분할 수 있다. 창 밖의 전체적인 풍경을 제시하고 있는 1연 1-6행과 갑자기 그 풍경 속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나방'을 보여주는 1연 7-9행이 말 없는 서경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면, 느낌표 하나로 처리되고 있는 1연 10행은 그러한 풍경 즉 자연 현상에 대한 시인의 자각의 순간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풍경과 그 풍경에 대한 인식은 연과 연 사이의 휴지(休止)를 거쳐 마지막 2연에 이르면 단 한 행에 의해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중략)-

이 시의 중심은 단순히 풍경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에 대한 시인의 인식과정을 드러내주는 데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우주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창 밖으로 가득히 메워지는 무언가가 있다. "먹구름떼"와 "쏟아지는 비"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바깥/먹구름떼/쏟아지는 비" 등은 조사나 연결사가 생략되어 매우 간결하게 표현되고 있을 뿐 아니라, 각 행을 명사형 종결어구로 끝맺고 있다. 이로써 창 밖의 풍경은 넓은 창을 가득히 메워 미적 효과를 극대화시킬 뿐 아니라 시각적인 이미지 자체를 전경화시킴으로써 선 굵은 이미지들을 간결하고도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중략)-

'먹구름', '비', '저녁빛', '큰 바람'이 만들어내는 거대하고 우주적인 순간에 나방 한 마리가 끼어든다. 그런데 낯선 이 작은 존재를 통해서 넓은 창밖의 풍경은 일순 해체되며 전혀 다른 서경의 순간이 펼쳐지게 된다. 넓은 창이라는 고정된 틀이 '휙'하고 벗겨지면서, 거대한 우주의 크고 수직적인 뚜렷한 운동성이 나방 한 마리의 날개짓과 충돌하는 것이다. 무생물적 세계와 생명의 존재, 수직적 하강과 수평적 가로지름, 큰 것과 작은 것의 맞부딪침에서 시는 역동인 생명성을 획득한다. 이제 작은 생명은 풍경의 일부로 몰입되어,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진다. -(중략)-

작은 "나방"의 존재 하나가, 그리고 단지 비 오는 풍경 속을 '휙 지나가'는 그것의 작은 몸짓 하나가 풍경을 그냥 그림이 아닌,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세계로 만들어 주다니! 시인은 이러한 생명의 위대함에 대한 자각을, 그리고 이를 통해 느끼게 되는 작은 생명체에 대한 경이를 느낌표 하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경이와 감탄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짧은 시 한 편을 두고 원고지 40매 이상을 들여서 그야말로 정치(精緻)하게 읽어내려 가는 김현자의 문학 비평이 뿜어내는 비평적 아우라를 나는 도저히 재구(再構)할 수가 없다. 기자는 이 글을 지난 해 시전문지 <서정시학> 기획연재물에서 보았는데, 밑줄을 그어가며 두 번이나 읽던 그때의 감동과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시가 제일 이해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런데 김현자의 평론집 <청빛 길의 시학> 읽고 면 시 읽기의 개안(開眼)이 단번에 이루어질 것만 같다.

나는 이 책을 맛있는 음식을 아껴가면서 먹듯 그렇게 읽었다. 현재 우리 시단에서 이화여대 출신의 많은 젊은 여성 비평가들이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데, 그 뿌리의 힘이 다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짐작이 간다. '아청빛' 만난 게 내겐 여간 다행이 아니다.

아청빛 길의 시학

김현자 지음,
소명출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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