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피해지역 자원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찍었던 사진김경건
친형이 갈비뼈를 다쳐 입원해 있는 터라, 쉽게 이렇다 저렇다 고민조차도 하고 있지 못할 무렵, 친형과 같은 병실에 입원해 계시던 분께서 뉴스를 보시면서 "아이고! 큰일 났네! 큰일 났어!"라는 말만을 되풀이 하셨다. 사실 농활은 자주 다녀봤지만 비닐하우스, 그리고 자연재해에 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못했던 터라 형과 같은 병실을 사용하시는 분의 말씀이 와 닿지는 않았다.
다음날 형이 입원해있는 병원 근처PC방으로 가 한참 동안 기사 검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폭설피해 관련기사를 읽어보게 되었다. 기사를 보는 순간 머릿속을 강타하는 충격을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다. 지붕에서 쏟아진 눈에 파 묻혀 노익장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그리고 축사에 깔려 다친 농장주관련 기사, 그때 과연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혼잣말로 구시렁거렸다.
"아... 이거 자원봉사도 갈 수 없고, 어찌하나?"
그때, 몇 주 동안 입원실에서만 지내다 지극히 친절한 동생(본인)의 도움으로 병실탈출에 성공한 친형이 말을 걸었다.
"뭔데?"
"응, 폭설 때문에 농민이 돌아가셨다는데? 축사에 깔려서 다치신 분들도 계시고..."
"이야... 진짜 큰일인가보다."
폭설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두 형제가 인터넷 이곳저곳을 뒤져 보며 폭설이란 화두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도중 친형이 한마디를 건넸다.
"야 그러지 말고 네가 한번 갔다 와봐, 어차피 너 오마이뉴스인가에 글도 올린다며? 어차피 기사감도 나올 것이고, 가서 노력봉사도 좀 하고."
농담반 진담반 던진 이야기긴 했지만, 형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던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서 가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인터넷에 게시물을 올리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기 위해 몇 군데에 수소문을 해본 것이었다. 전북 재해대책상황실에 전화를 하고 관련된 내용의 글을 인터넷 게시판에 다시 올렸다.
얼마나 모일까?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몇 번인가 수해관련 자원봉사도 시작해봤던 터라 얼마나 사람이 모일지에 대한 기대감보다 상실감이 먼저 온다는 것을 먼저 경험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오후 즈음 전북재해대책상황실에서 고창군상황실 쪽에 연락을 해두겠다고 했다.
일단 병원에 입원해 있는 형의 끼니를 챙겨줘야 하기 때문에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 휴대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려보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는데 대략 20살 정도의 학생인 듯했다. 한참 통화를 하고선 폭설피해지역이 정해지면 그곳으로 향하기로 약속을 하곤 연락을 다시 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고창군 재해대책상황실에서 연락이 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관련된 내용을 폭설피해지역으로 동행하기로 했던 몇몇 지인들께 알리고는 인터넷 게시물의 정보수정을 해두었다. 일주일, 아니 이주일 뒤에 갈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던 중, 잘 알고 지내던 지인께서 전화를 주셨다.
"김 선생 이왕 가려면 일찍 갑시다. 그래야 빨리 도울 수도 있고, 며칠 더 할 수도 있잖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고민이 해결됐다. 일단 집에서 작업복으로 활용하던 옷 몇 가지를 챙기고, 돌아올 때 입어야 할 옷가지들도 챙겨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시작된 전화 폭격,‘머릿속이 뜨끈해질 정도로 전화가 왔다.
많은 단체와 시민들이 함께 하고자했다. 대략 수첩에 적었던 명단의 숫자를 일일이 세어본다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수첩의 표면은 아주 거칠게 볼펜에 의해 칠해져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폭설피해지역에서 고생하시는 자원봉사자 분들이 아직 계십니다. 물론 새해 구정연휴를 이용해서 자원봉사를 하시기로 하셨던 분들이시죠. 그분들께 작게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싶어 폭설피해지역 자원봉사 시작된 시기 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있었던 일을 모두 글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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