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듣고 싶다, 박정대의 아무르 기타 소리

[서평] 박정대의 세 번째 시집 <아무르 기타>

등록 2006.01.31 10:20수정 2006.01.31 10:23
0
원고료로 응원
a 박정대 시집 <아무르 기타>

박정대 시집 <아무르 기타> ⓒ 문학사상사

이상한 시집이 한 권 있다. 이 시집은 "은델레 기타, 이낭가, 그리고 하노이 36거리의 낡은 풍로에게" 바친다는 언술을 시집 맨 앞머리에 적고 있다. 그리고 이 시집을 펼쳐들면 시집 곳곳에서 음(音)과 악(樂)의 소리가, 음악이 끝없이 들려온다.

이 시집의 구성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은델레 기타는 3줄이다'에 작품 22편이 실려 있고 2부 '이낭가는 8줄이다'에도 22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3부 '은델레 기타와 이낭가의 줄을 합치면 11줄이다 아니 44줄이 될 수도 있겠다'에는 작품이 1편도 편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3부의 긴 제목이 시 제목인지, 아니면 시집 끄트머리에 시인이 마지막으로 토해놓은 어떤 다른 말씀인지 도저히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쯤 말하면 이 시집이 뭔지 독자 여러분은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박정대의 세 번째 시집 <아무르 기타>(문학사상사,2004)가 그것이다.

필자와 동갑내기인 시인 박정대는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외 6편의 시로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2003년 시 '마두금 켜는 밤'으로 제14회 김달진문학상과 2005년 시 '아무르 강가에서'로 제19회 소월시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뭐 하는 곳인지는 잘은 모르지만 그는 현재 '목련통신' 편집장,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그가 펴낸 시집으로는 <단편들>(세계사,1997),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민음사,2001), <아무르 기타>(문학사상사,2004)가 있다.

잘 있었는가, 그대들

비파, 파리, 소, 현금, 북을 연주하던
백제금동대향로의 오악사들이여

오늘은 완함의 악사가 아파
내 낡은 비파를 들고 그대들에게로 가나니


아프지 말게, 사랑이여

우리 이렇게 꿈결처럼 흘러
언젠가 저 음악의 大地에 당도한다면


그 아득한 내면 속에
숨결처럼 따스한 불꽃 간직할 수 있을 테니

우리가 밤처럼 깊어지면
그러면

- '백제금동대향로의 오악사' 전문.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내면에 간직한 불꽃을 다스릴 낡은 비파를 들고 저 음악의 대지(사랑의 세계, 푸른 고원)로 가리니 아프지 말아라 사랑이여, 라고 말한다. 위 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박정대의 시집 <아무르 기타>에는 온통 출렁거리는 음악이 난무한다. 비파, 은델레 기타, 마두금(馬頭琴), 망기타 혹은 忘記他, 밀롱가, 실내악(室內樂), 이낭가 이런 것들에서 타오르는 음악으로 시집은 불타고 있다.

나의 기침 소리도, 담뱃재 사각사각 타들어가는 소리도 실내악이요, 멀리서 네 심장이 뛰는 소리도 북소리다. 고독이 또 다른 고독과 만나 고구려고구려(高句麗高句麗) 넓어지는 소리, 침묵이 또 다른 침묵 위에 백제백제(百濟百濟) 쌓이는 소리, 얼음장 속 송사리들 소리 없이 신라신라(新羅新羅) 지느러미 흔드는 소리도 음악들이다. 산초나무에게서도 음악을 듣고, 낙엽도 한 잎의 푸른 음악이요, 겨울 바람이 문풍지를 두드리는 것도 음악이고, 어디로 가는 배도 한 척의 음악이다. 온통 출렁대는 음악뿐이다. 이 음악들이 박정대의 시집 <아무르 기타>를 밀고 가고 있다.

'자서'에서 시인은 가수 밥 딜런을 두고 "그는 시를 쓰지 않고 시를 노래한다"고 했다. 이 말을 그대로 빌려 나는 박정대 시인은 시를 노래하듯 쓴다, 아니 음악으로 쓰고 있다, 라고 말하고 싶다. 음악으로 적고 있는 그의 시 몇 군데를 옮겨다 본다.

"그리고 우리가 먼 훗날, 태양이 식어가는 낡고 오래된 천막 같은 밤하늘의 모퉁이에서 서러운 별똥별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살아 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내가 꿈꾸는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비파/(중략)/그대에게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악사들')

망가진 기타에 줄을 매는 건 知音일 뿐, 망가진 기타를 스스로 고치난 자 가수가 아니네 시인이 아니네

기타가 망가지면 가수는 스스로의 목청으로 기타가 디고 기타가 망가지면 시인은 스스로의 온몸으로 악기가 되네

망가진 기타에 줄을 매는 건 언제나 아직도 이 지상에 남아 있는 어둡고도 따스한 아픔들일 뿐, 그 아픔들이 매어논 기타줄을 두드리며 나 다시 노래 부를 힘을 얻네('망기타')

그대가 나를 꿈꾸지 않으므로 나는 오래도록 그대를 꿈꾸었다/그대가 나를 연주하지 않으므로 나는 오래도록 그대를 연주했다/그러한 것들이 음악이 된다고 믿던 날들이 있었다('키스의 음악이 완성되었다')"

아, "나는 아직 살아 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라는 박정대의 서럽고도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환청(幻聽)인가, 아닐 것이다. 그건 분명 시인 박정대가 연주하고 있는 음악(詩)일 것이다. 그가 시집 여기저기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은 "밤의 부둣가에서" "내 상처를 두들겨 木船 한 척 맹그"는 일과 같다. 왜 인가? "그대에게 밀항하기 위하여"서다. 그가 말하는 내 밀항의 처소는 "한 잎의 사랑과 한 잎의 자유를 꿈꾸"는 곳이요, "사랑의 적소"이다. 그러나 꿈은 언제나 꿈일 뿐이다. 그러므로 시인 박정대는 분명 아직 그곳에 가 닿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내몽고 몽골 초원, 베트남 하노이36거리, 중국 찡따오 같은 곳이나 또 다른 어느 길거리에서 "서러운 악보처럼 펄럭이"며 음악을 연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박정대의 시집 <아무르 기타>를 두고 이상한 시집이라고 명명(命名)했다. 솟구쳐 오르는 혼몽한 내면 세계를 자의식의 통제 없이 마구 쏟아내고 있는 자동기술법으로 진술되고 있는 그의 시적 어법은 독창적이다. 시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적 시 형식에 얽매여 있지 않는 그의 이런 시적 어법과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전통적 시 형식을 잘 지킨 어떤 시들보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詩)은 감동적이었고, 감염력이 강렬한 음악이었다. 제19회 소월시문학상 심사평에서 "기실 시란 어떠해야 한다는 전제도, 정형도 없다. 다만 독창적인 신선함(novelty)으로 천(千)의 얼굴 만(萬)의 모습을 할 수 있을 뿐. 이 시인의 이런 성향이 신선하고 대담하고, 말맛이 있는 언어의 마술로서의 시의 기능과, 서정시도 웅장하고 대담무쌍할 수 있다는, 새 지평을 열어 보인 가능성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라고 한 유안진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의 아무르 기타 소리를 또 듣고 싶다.

아무르 기타

박정대 지음,
최측의농간, 2018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4. 4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5. 5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