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첩> 겉그림성균관대학교출판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고 했던가? 그러나 오히려 북녘 동포와 산하(山河)는 볼 수 없어 더욱 그립고, 애틋한 정이 새록새록 돋아나지 않던가? 반세기 동안 한반도의 허리를 끊어 놓은 철의 장벽 38선도, 북녘 동포를 뿔 달린 도깨비로 세뇌하던 반공 교육도, 일제 식민통치에 버금가는 반세기 냉전 체제도 우리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동포애와 민족애를 지우지 못했다. 그렇게 반세기 동안 갈 수 없어 꿈에서나 그리워하던 금강산을 지금은 관광버스 타고 유람하게 되었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지난 날, 갈 수 없는 금강산은 민족 분단의 한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상징적 존재이자 아름답기 때문에 더욱 슬픈 일종의 '역설의 미학'이었다. 그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던 것은 다름 아닌 선인들이 남기고 간 옥문(玉文), 가편(佳篇)들이었다. 학창시절에 정철의 <관동별곡>과 정비석의 <산정무한>을 읽고 금강산의 비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갈 수 없는 금강산에 대한 적회(積懷)를 달래던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관동별곡>이나 <산정무한>처럼 친숙하지는 않지만, 이풍익의 <동유기(東遊記)> 역시 빼어난 금강산 유람기다. 특히 김홍도 같은 당대 최고의 화공들이 직접 그린 실경산수화 28점을 시문과 엮어 <동유첩(東遊帖)>이란 서화첩으로 편찬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빼어난 자연묘사의 전범
"내 언젠가 <화엄경>에서 '동해에 금강산이 있으니, 참으로 살 만한 곳이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 중국 사람들도 금강산 한번 보는 것이 평생소원이라 하니, 그 뛰어난 풍광이 천하제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것만 좋아하고 제 것은 홀대하는 습성이 있는 것인가. 엎어지면 코 닿을 곳, 금강산! 그곳으로 한번 떠나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연자방아에 매인 나귀처럼 일생을 허비한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인가!"
21세 청년 이풍익은 '안목을 넓히고 큰 포부를 갖기 위해' 을유년(1825) 8월 초 4일 금강산 유람길을 떠난다. 그의 말마따나 남의 것만 좋아하고 제 것은 홀대하느라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금강산을 가보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이를 뒤집어 보면 전쟁과 분단으로 금강산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던 냉전의 반세기가 우리 민족의 정신적, 물질적 경계를 얼마나 좁혀 놓았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산!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민족의 영산(靈山). 정비석은 <산정무한>에서 "혹은 깎은 듯이 준초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하고, 혹은 막 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 산의 품평회(品評會)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라는 말로 금강산의 다양 다기한 풍모를 묘파한 바 있는데, 이풍익은 기기묘묘한 금강산의 영봉들이 "마치 항아리를 엎어 놓은 듯" "옥구슬을 튕겨놓은 듯, 연꽃을 떠받친 듯" "부처를 호위한 듯" "구름 덮인 봉우리들 경주하듯" 그야말로 변화무쌍, 형형색색의 열병식을 연출하는 장관을 다채롭게 그려낸다.
이풍익은 옹천, 총석정, 해금강, 삼일호, 신계사, 옥류동, 비봉폭, 구룡연, 유점사, 묘길상, 마가연, 백운대, 진주담, 보덕굴, 만폭동, 수미탑, 명경대, 장안사, 단발령 등의 명승지를 주유(周遊)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시와 산문을 적지 않게 남겼는데, 그의 문장은 가히 서포 김만중이 동방의 이소라고 극찬한 정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산이면 산, 호수면 호수, 폭포면 폭포, 바다면 바다, 그의 붓끝에서 흘러나온 시문은 탁월한 자연묘사의 전범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 | | 이풍익(李豊瀷)은 누구? | | | | 1804(순조 4)∼1887(고종 24).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곡(子穀), 호는 육완당(六玩堂). 아버지는 존우(存愚)이며, 어머니는 풍산홍씨(豊山洪氏)로 경안(景顔)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우의정 화우(和愚)에게 입양되었다.
1829년(순조 29)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가 되었고, 1838년(헌종 4)병조정랑, 1847년 대사간, 1873년(고종 10)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44년 경상좌도의 시관으로 있을 때 감식에 밝고 공평하였으므로 영남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858년(철종 9)어사 이건필(李建弼)의 탄핵을 받아 김제로 귀양갔으나 곧 풀려났다.
1881년(고종 18)예조판서로 있을 때 동궁의 풍악설치문제로 이론이 있었으나 《서전 書傳》의 고사를 인용하여 악관의 설치를 청하여 채택되게 하였다.
그뒤로 동궁이 거동할 때나 사부(師傅)의 상견례를 행할 때는 풍악을 설치하는 것이 정식화되었다. 저서로는 《육완당집》 6권이 있다. / 엠파스 한국학지식 참고 | | | | |
이풍익의 <동유기>는 정철의 <관동별곡>, 정비석의 <산정무한>에 비해 더 상세한 노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어느 작품보다 금강산의 면모가 알차게 소개되어 있는데, 각각의 작품을 비교하며 읽으면 그 묘취가 배가된다. 일례로, 정비석이 '거울의 요술'에 비유한 명경대와 이풍익의 붓끝에 담긴 명경대를 함께 음미하면 더 깊은 풍미가 우러나는 듯하다.
또한 송강 정철이 "금강대 맨 꼭대기에 학이 새끼를 치니 봄바람에 들려오는 옥피리 소리에 선잠을 깨었던지, 흰 저고리 검은 치마로 단장한 학이 공중에 솟아 뜨니, 서호의 옛 주인 임포를 반기듯 나를 반겨 넘나들며 노는 듯하구나!"하고 읊자, 이풍익이 "신선도 학을 타고 피리 불며 머물지니 자라 등에 놓인 신산(神山) 무에 그리 부러울까"하고 화답하는 듯하다.
특히 금강산 유람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비봉폭포, 구룡폭포에 이르면 정철과 이풍익의 붓끝에 일진광풍이 휘몰아치는 듯하다.
"백천동을 지나서 만폭동 계곡으로 들어가니, 은같은 무지개 옥같이 희고, 고운 용의 꼬리 같은 폭포가 섞어 돌며 내뿜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퍼졌으니, 멀리서 들을 때에는 우렛소리 같더니, 가까이서 보니 눈이 날리는 것 같구나!" - 정철, <관동별곡>
"천 길 절벽 매달린 채 떨어지는 물줄기 푸른빛 노을 자줏빛 안개 일렁이네. 뿜어나는 구슬 우박 삼계(三界)에 번득이고 쏟아지는 은하수 하늘에 걸렸구나. 흔들리는 산속엔 귀신도 넋을 잃고 시끄런 골짜기라 용도 잠 못 이루리. 산신령이 비를 몰아 장관을 더 보태니 이 모두가 신선께서 도우셨다 말들 하네." - 이풍익, <동유첩>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이풍익과 정철이 신선(神仙)을 자처한들 누가 탓할 수 있으랴? 절경을 눈에 담고 절창을 입에 담으면 누구나 신선인 것을. 이제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신산(神山)을 유람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가서 신선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앞으로 금강산 유람을 준비하는 분들이라면 길을 떠나기에 앞서 죽장 짚고 짚신 신고 험산준로를 오르내리던 선인들의 호연지기를 한번쯤 가슴속에 되새겨 봄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두로(荳老) 박종훈이 "대나무 창으로 보슬비가 뿌릴 때, 그윽한 다향(茶香)을 음미하며 이 책을 펼쳐 본다면 저절로 내 마음이 그득 채워질 것이니 이 얼마나 유쾌한 일이겠는가!"라고 극찬한 이풍익의 <동유첩>으로 노독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날 밤의 객수를 달래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풍익, <동유첩>,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5
동유첩
이풍익 지음, 이성민 외 옮김,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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