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들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 중 '김처선'과 관련된 내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사본.최육상
- 내시들이 힘없는 왕 뒤에 숨어서 국정을 뒤흔들었다는 좋지 않은 인식도 있습니다. 내시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조선은 조금 덜하지만, 고려 때는 막강했죠. 특히 원나라에 가 있던 고려 출신의 환관들의 세도는 말도 못해요. 황제 다음의 지위에 있던 승상을 마음대로 부릴 정도의 권세를 가진 고용보(高龍普)나 원나라 조정에서 봉사하며 충선왕을 귀양 보낸 고려인 출신의 원나라 환관 '임빠이앤투그스(임백안독고사)'가 대표적이에요."
- 내시 중에도 충신과 간신이 있었을 텐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누가 있나요?
"앞서 말한 대로 김처선은 문무 양반관료들도 하지 못하는 직언을 임금이었던 연산군에게 하는 충신이었습니다. 반대로 김자원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간신 내관이었습니다. 김처선은 임금의 수라상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종 2품 상선 내시였고, 김자원은 왕명 출납 등을 담당하는 정 4품 상전 내시였습니다. 직책은 김처선이 높았지만 영향력은 김자원이 더 컸죠.
선조 때 내시 이봉정은 글씨를 잘 쓰는 명필가로 유명했는데, 선조 곁에 머물면서 선조의 필법을 흉내 내기도 했어요. 선조가 부채에 어필로 직접 쓴 시를 하사 받기도 했으니까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죠."
- 내시들의 일상생활은 어땠나요?
"사람들은 내시가 궁 안에서만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시들의 관서인 내시부(內侍府)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했어요. 또 오늘날 종로구 봉익동, 운니동 일대, 은평구 신사동, 응암동 일대, 서대문구 연희동, 가좌동 일대, 양주, 고양, 남양주, 과천, 용인, 안양, 파주 등 거의 수도권 전역에 걸쳐 거주했어요.
내시는 크게 궁에서 먹고 자는 장번(長番) 내시와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 내시가 있는데, 장번 내시도 일정 기간 근무하고 나면 나갈 수 있어서 궁 밖에 가정을 두고 일반인들처럼 생활했어요. 내시들의 묘도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도봉구 쌍문동, 노원구 월계동, 고양, 양주, 남양주, 파주 심지어 평안남도 강동, 경상북도 풍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에 산재해 있는 걸요."
내시도 음경은 있었다, 아내 두고 성관계도
- 사람들이 내시들의 성생활을 무척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이 내시는 거세된 자로 아는데, 고환만 없었을 뿐 음경은 있었기 때문에 성관계가 가능했어요. 반면 중국의 환관은 음경과 고환이 모두 없어 불가능했지요. 이는 원로 향토사학자 김동복(77)씨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내시의 성관계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예요.
김씨가 어릴 때 노인들한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고종 34년(1897년)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영등포 쪽 '용추'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고 해요. 당시 음경은 남겨 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비명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주로 비 오는 날 천둥번개가 칠 때 했다는 거예요. 김동복씨가 어렸을 때 옆집에 내시의 아내가 살았는데 김씨의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박상진씨가 2005년 펴낸 <내시와 궁녀>.가람기획
- 원래 환관은 궁녀들과의 문란한 성생활을 방지하기 위해 거세한 것 아니었나요? 그런 내시가 성관계가 가능했다니 좀 의아하네요.
"내시의 성관계 유무는 당시 내시들이 아내와 첩을 뒀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음경 자체가 없었다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겠느냐 이거죠. 김동복씨가 들은 내시 부인들의 대화를 보면 성관계가 가능한 내시들도 사정을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목덜미와 어깨를 깨물어 아내들이 무척 괴로워했다고 해요. 그래서 내시 아내들 대부분이 6개월을 못 견디고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거죠. 내시의 계보를 잇는 양자(養子) 제도는 정자를 생산할 수 없었기에 당연했던 거고요."
- 지난해 <내시와 궁녀>라는 책을 펴내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003년 북한산에서 내시의 집단묘역 45기를 처음으로 확인하고 세상에 알렸어요. 그 뒤 내시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딜 가도 관련 서적 하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시와 궁녀에 대해 파고든 거죠. 내시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와 내시들의 개인문집,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경국대전> 등 정사와 야사, 법전 자료집 등 100여 종의 문헌과 자료를 2년 정도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 | | 연산군에게 죽임당한 김처선 vs 반정 앞두고 도망간 김자원 | | | | 나라가 어수선할 때 충신과 간신은 둘 다 빛을 발하면서도 명암을 달리한다. 영화 <왕의 남자>의 배경인 연산군 때 공교롭게도 이들을 각각 대표하는 조선의 내시가 모두 등장한다.
극중 연산군의 곁에서 공길과 장생을 돌봤던 김처선은 내시를 대표하는 충신이다. 그는 연산조에 성종릉인 선릉의 시릉관(侍陵官)을 지내고 140명을 통솔하는 내시부의 수장인 판내시부사로 있었다.
어느 날 연산군이 스스로 지어낸 처용놀이를 하며 온갖 음란한 짓을 다하자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에게 바른말로 직언한다.
"전하,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네 지금 뭐라 했느냐?" "전하, 이 늙은 놈은 세조대왕으로부터 무려 네 임금을 섬겨왔사옵니다. 또한 경서와 사서를 읽어 대강 통하오니 일찍이 전하와 같은 놀이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사옵니다. 속히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고금에 나 같은 자가 없었다? 그래,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구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네 원대로 죽여주마."
화가 치민 연산군은 처선을 향해 활을 당겨, 그를 죽였다.
한편 김자원(金子猿)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인도한 대표적인 간신이다. '원숭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남의 눈치를 잘 살피고 말주변이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데 능했다.
그는 성종과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 내관으로 있을 수 있었다. 비록 품계는 4품에 지나지 않았으나 왕명을 사칭하여 위세를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고, 말 한마디에 벼슬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위세를 떨쳤다. 나주 출신인 그를 위해 나주 관아에선 여러 채의 집을 지어주기까지 하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계집종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처족이 궐내의 각 색장(色掌)에 많이 소속되어 그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마치 옛날 당나라의 권신 환관 고력사와 같았다고 한다. 결국 반정으로 연산군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 그는 왕을 속이고 바깥 동정을 살핀다는 핑계로 달아나 숨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그를 <조선왕조실록>은 간신으로 기록했다. | | | | |
[세트] 왕이 된 남자 1~2 세트 - 전2권
김선덕 지음,
북라이프, 2019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전북 순창군 사람들이 복작복작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