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도 포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건축물, 당시 건물 주인은 일본인으로 잡화점을 운영했다.김준
삼치,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조선사람 먹기 아깝다"
일제강점기 이곳 나로도 포구의 상권도 일본인들이 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곳에는 즐비했던 일본식 이층집과 가공공장들은 사라지고 유일하게 일본식 건물 한 채가 지붕만 바뀐 채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와다'라는 일본인이 거주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 집은 수협 옆 포구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당시 그 일본인은 어구를 비롯해 잡화를 판매했으며, 식량 배급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한일합방 무렵 우리나라 해역에서 나는 활어를 실어 나르기 위해 일본의 어항축조기술자들이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다 나로도를 대상지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들이 처음에는 지금 나로도항 반대쪽 창포 쪽에 머물려 현지조사를 하던 중 지금의 축정마을 포구를 보고서 바로 어항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해방이 될 때까지 전국에서 잡힌 생선들이 이곳 축정항에 모아져 일본으로 실어갔다. 당시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 뱃사람 중에 '축정을 모르면 뱃사람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광주일보> 1982. 1. 30 참조). 이곳 축정마을은 한때 일본인 500여 명이 거주할 정도였으며, 1932년에 상수도 시설과 자가발전 시설을 갖췄을 정도였다. 실제로 나로도에 전기가 공급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일제강점기 편찬한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고흥 일대의 고기잡이는 수조망(手繰網), 궁망(弓網), 어전(魚箭)과 외줄낚시를 이용했다. 수조망과 궁망은 조류를 이용해 자루그물을 펼쳐 고기를 잡는 것으로 배를 가지고 자루그물을 이동하는 안강망의 원조쯤 되는 고기잡이 방법이며, 어전은 죽방렴이나 석방렴(독살) 등을 말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잡은 생선들로는 새우, 조기, 갈치, 민어, 가오리, 준치, 가자미, 농어 등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삼치가 "조선 사람 먹기 아깝다"며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실어갔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나로도 인근에서는 삼치잡이가 성해 가을이면 수백 척의 배들이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고, 나로도 출신의 학생들은 '교복 단추를 금으로 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삼치잡이로 재미를 톡톡히 보던 나로도 항은 어청도, 흑산도, 청산도, 성산포, 거문도 등 10개의 포구와 함께 1966년에는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되었다. 당시 어업전진기지란 급수시설과 급유시설, 공동창고, 어업 무선국이 설치되고, 어획물을 처리·유통할 수 있는 가공시설 등 어업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갖추고 있는 다목적 어항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