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저 마늘밭에서 태어났단다

[바다에서 부치는 편지 11] 고향

등록 2006.01.28 13:31수정 2006.01.29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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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도 항이 있는 축정마을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20여 가구나 될까 싶은 작은 마을 엄남마을이 있습니다. 높지 않는 밭 구릉이 바다로 내려오다 멈춘 작은 공간마다 서너 채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나이든 노인들의 빠진 이빨 자리마냥 듬성듬성 비어 있는 곳은 섬 집을 버리고 도회지로 나간 마을 역사의 흔적들입니다.


대부분 어촌마을이 그렇듯 이곳도 아이들 교육을 위해, 취업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갔습니다. 고향에 붙어 살아보려다 고기가 잡히지 않아 안강망 배 처분한 뒤 있는 돈 모으고 대출받아 가두리 양식에 투자한 후 지난 태풍으로 두 주먹만 쥐고, 같이 양식어업을 한 죄로 어깨보증(서로 연대보증을 해주는 것)을 하고 잘못되어 고향을 떠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들에게 명절이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준
김준
"저 마늘 밭이 아빠가 태어난 곳이란다."
"마늘 밭에서 어떻게 사람이 태어나?"
"전에 이곳은 밭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던 집이 있었단다."

마늘과 돌담뿐인 곳에서 아버지가 태어났다니.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만한 아이가 마을의 내력과 고향집이 마늘밭으로 변한 사연을 이해하기에는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설을 앞두고 미리 내려와 성묘를 하는 모양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한 가족이 마을 포구의 끝자락을 돌아 마을을 둘러보고, 마늘 밭으로 변한 집터를 보면서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말입니다. 아이는 마늘 밭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셨던 집을 찾기가 쉽지 않는 모양입니다. 연신 고개를 돌려 마늘밭을 보며 갸우뚱갸우뚱합니다.

김준
마늘밭으로 변하지 않는 주인이 없는 집들은 오히려 쓸쓸합니다. 가장 눈에 띠는 집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바닷가 함석집이었습니다. 제법 틀을 갖춘 집으로 보아 마을에서 잘 사는 집에 속한 듯합니다. 마루를 포함해 부엌과 안방, 광, 작은 방으로 구성된 4칸짜리 집으로 모양새가 잘 갖춰진 집입니다. 이 집 주인은 무슨 사연으로 고향을 떠났는지 알 수 없지만, 안방에는 자물쇠 대신 보습이 빠진 쟁기가 알몸을 드러낸 채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김준
김준
바닷가에 작은 가게 밑에는 두 척의 배가 주인을 기다리고, 두 대의 차가 도회지에서 온 고향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방금 마을 뒷산에서 성묘를 한 가족들이 타고 온 차들인 모양입니다.

마을 뒤쪽으로 새로 길을 닦고 있습니다. 나로도 항이 있는 축정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엄남마을로 오는 길은 겨우 차가 지날 만한 골목길입니다. 그 작은 골목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났고, 명절이면 고향을 돌아왔을 겁니다.


한때 삼치파시로 유명했던 나로도 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도 수산물가공공장이 있어 40여 년 전만 해도 제법 활기를 띤 마을입니다.

김준
들어올 때 조용했던 마을이 잠시 술렁입니다. 고개만 들면 내려다보이는 담 너머로 성묘하러 온 이들을 마을주민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반갑게 악수를 나눕니다. 고향에서 작은 마늘밭과 갯가에서 해초를 뜯으며 사는 사람들의 거친 손과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나간 사람의 부드러운 손이 잠시 동안 엉켜집니다. 서로에게 말로 전할 수 없는 느낌이 전달되었을 겁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도 고향을 찾는 사람도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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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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