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계곡에 눈이 내리다

백담사를 다녀오며 ②

등록 2006.02.03 12:24수정 2006.02.03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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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백담계곡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장 잦은 계절은 가을이 아닌가 싶다. 그때면 백담사까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셔틀버스는 하루 종일 분주하기 이를 데 없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은 지루하도록 길게 늘어선다. 그때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가장 큰 힘은 계곡을 불태울 듯한 설악의 가을 단풍이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백담계곡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며 셔틀버스도 운행을 중지한다. 그때부터 백담계곡의 나무들은 이파리를 모두 비워낸 채 겨울을 나지만 그곳에 눈발이 날리면 그 빈자리가 갑자기 하얗게 채워진다.


매표소로부터 꼬박 6km를 걸어 백담사에 닿고 또 그 길을 그대로 걸어 나오며 흰눈에 묻혀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시인 이재훈이 "흰 눈을 만나기 위해/폭염을 견디었는지 모른다"고 노래했던 어느 시의 시 구절이 마치 이곳의 눈을 노래하기 위해 예비해 둔 것 인양 착각마저 든다.

1월 31일부터 대설주의보 소식이 이틀이나 이어지며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고, 결국 나는 2월 1일에 아침 일찍 백담사로 나섰다. 백담계곡은 앙상한 나무 가지로 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얀 눈으로 눈이 시리게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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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백담계곡에선 초입부터 자꾸 걸음이 그 호흡을 멈춘다. 눈이 내리면 걸음의 호흡은 더더욱 자주 끊긴다. 눈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눈과 바위에 오직 흰색만으로 그 윤곽을 따라 채색을 시작하며 그러면 누구나 그 풍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걸음의 호흡은 멈추고 눈의 호흡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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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그 여린 가지의 어디에 발붙일 자리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눈은 오늘 그 옹색한 자리를 마다않고 어느 가지 위에서나 빠짐없이 걸음을 멈춘다. 아마도 눈은 겨울나무의 그 앙상함이 안쓰러워 가지 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눈의 느낌이 포근하고 따뜻한 것은 그것의 겉모습이 솜털을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등을 부빌 자리도 없는 듯한 앙상한 삶을 스칠 때 그 앙상함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가지 끝에 앉아 오늘 눈꽃으로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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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하늘은 파란색, 구름은 흰색. 하늘은 바다를 지날 때면 제 색을 내려 보내 바다를 파랗게 물들이지만 오늘은 백담계곡을 지나며 구름을 내려 보내 산을 하얗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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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백담사 스님들께서 산책 나온 길을 중간쯤에서 접어 다시 절로 향하신다. 길가의 바위와 나무들이 조용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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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마음을 닦는 다리, 수심교의 건너편에 백담사가 있다. 마음을 깨끗이 닦으면 마음은 그때부터 어떤 채색의 풍경이 되는 것일까. 수심교의 건너편에서 백담사가 말없이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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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만해 한용운의 뒤로 붉은 열매가 가을에 거두었을 제 빛을 그대로 간직한 채 겨울을 나고 있었다. 한용운의 앞으로 세상이 흰 눈에 덮여 있었다. 붉은 열정으로 추운 겨울 세상을 하얗고 포근하게 덮어주고 싶었던 것이 그의 안타까운 꿈이 아니었을까. 오늘 그의 눈이 유난히 슬퍼보였다. 아직도 도닥이고 위로해 주어야할 춥고 배고픈 삶이 많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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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누군가 돌 하나에 소망을 담고, 사랑을 담고, 또 꿈을 담았다. 그 소망과 사랑, 그리고 꿈이 오늘 하얀 눈밭의 한가운데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그 소망과 사랑, 그리고 꿈을 빌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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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2월의 눈 내린 백담계곡에서 듣는 물소리는 그냥 물소리가 아니라 봄이 오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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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봄이나 여름이나 아니면 가을이나 나는 항상 이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걸음을 멈추었다. 그 점은 겨울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들어갈 때 하늘은 잿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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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나올 때 하늘은 잿빛을 걷고 푸른 화폭에 흰구름을 펼쳐들었다. 나는 다시 이곳에서 오랫동안 걸음을 멈추었다.

덧붙이는 글 | 이런 눈풍경은 두세 시간 정도밖에 볼 수가 없어서 눈이 그치기 일보 직전에 강원도를 찾아야 한다. 바람과 햇볕 때문에 날려서 떨어지거나 녹기 때문에 사실 가장 아름다운 눈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다.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덧붙이는 글 이런 눈풍경은 두세 시간 정도밖에 볼 수가 없어서 눈이 그치기 일보 직전에 강원도를 찾아야 한다. 바람과 햇볕 때문에 날려서 떨어지거나 녹기 때문에 사실 가장 아름다운 눈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다.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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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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