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요리사에서 행복을 주는 요리사로

아이들의 평범한 꿈이 과일처럼 익어가기를

등록 2006.02.04 15:10수정 2006.02.04 15:11
0
원고료로 응원
저녁밥을 먹다가 우연히 식탁에 놓인 작은 책자에 눈길이 갔다. 보험회사에서 고객관리를 하기 위해 보내온 듯한 책을 나는 잠깐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 중요한 것을 기억해내기라도 한 사람처럼 식탁에 내려놓은 책을 얼른 다시 집어 들었다.

언젠가 책을 손에 들고 밥을 먹다가 아내에게 지청구를 들었던 기억이 나서 슬그머니 내려놓은 책을 다시 집어 든 것은 책 표지에 적힌 다음과 같은 문구 때문이었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당신이 되길 바랍니다.'

아내의 눈치가 보여 다시 책을 내려놓고는 슬금슬금 곁눈질을 하면서 밥을 먹다가 나는 아예 아내의 코앞으로 책을 들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말이 너무 배타적이지 않아? 그냥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라면 될 일이지 왜 꼭 누군가와 비교를 하느냔 말이야. 이렇게 하면 되잖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행복한 당신이 되길 바랍니다."

"듣고 보니까 그러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남이 불행하거나 덜 행복해야 하잖아."

나는 아내가 그렇게 말해준 것이 여간 고맙지가 않았다. 그 말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듯한 표정을 아내가 지어보였다고 해도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성공이나 행복의 정도를 가늠하는 것이 이미 하나의 관습처럼 굳어진 터에 자칫하면 괜한 말꼬리나 잡는 꼴이 될 터이니 말이다.


저녁식사를 마친 나는 문제의 책을 다시 집어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의자에 엉덩이를 대기가 무섭게 방에서 튀어나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바짝 다가갔다. 화들짝 놀란 아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조각가 로댕의 말이었다.

"아름다움의 극치는 한 여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여인에게 있다. 그녀들은 그것을 모르지만 모두가 그 아름다움에 도달한다. 마치 과일이 익듯이."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인 아이가 있었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는 누군가의 충고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별 의미 없이 갖다 붙인 수식어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아이의 꿈을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요리사'로 바꾸어 주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지만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요리사의 꿈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꿈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과일이 익어가듯이.

그렇다고 행복을 주는 요리사의 꿈이 그리 만만한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미각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남달라도 자기 자신이 먼저 행복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학교에서 아이들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것은 그냥 요리사가 되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요리사가 되겠다는 말은 당차고 분명한 꿈의 표현일 수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아이의 평범한 꿈이 과일처럼 익어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깁고 보탰습니다.

덧붙이는 글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깁고 보탰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3. 3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4. 4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5. 5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