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은 희디흰 눈비단으로 맞는다

태백산 눈꽃 산행

등록 2006.02.05 18:29수정 2006.02.05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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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아는 사람들 여덟 명으로 일행을 꾸린 뒤, 2월 4일 토요일에 태백산에 다녀왔다. 내 고향 영월을 거치고, 영월에서 옥동, 녹전, 상동을 지나 유일사 입구까지 갔으며, 그곳에서 산을 올랐다. 원래 서울에서 원주, 제천을 지나 영월까지 가는 길과 영월에서 상동을 지나 태백으로 가는 길은 둘 다 똑같은 길이었다. 예전엔 그 두 길이 모두 가는 내내 쉼 없이 구불거렸다.

결혼을 하고 처음 아내와 함께 고향에 내려갈 때, 우리는 고개를 네 개나 넘어야 했으며,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것을 이제 고향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는 설렘으로 삼았다. 그렇게 강원도의 길은 어디나 편하게 발을 뻗질 못했다. 강원도의 길은 항상 양의 창자처럼 이리저리 구불거렸고, 그래서 그 길을 갈 때, 나는 강원도의 뱃속을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 때문인지 그 길에서 아늑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새 길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길은 내가 지금까지 다녔던 강원도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그 길은 아주 편하고 시원스레 다리를 쭉 뻗고는 우리가 그 길을 마음대로 내 달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이제는 영월까진 한 번도 고개를 넘지 않는다. 중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하여, 호법에서 영동으로 바꿔 타고, 남원주에서 다시 중앙고속도로로 길을 바꾼 뒤 제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고속도로로만 한걸음에 달려가며, 제천에서도 4차선의 시원스런 새 도로를 타고 눈감았다 뜨는 짧은 순간이면 벌써 영월에 도착한다.

그 길은 정말이지 편하고 빠르다. 나는 그 길을 갈 때마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의 급한 마음을 채워주는 빠른 속도감을 얻었지만 한편으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앓았다.

그러나 영월을 지나 옥동, 녹전, 상동을 거치며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직까지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영월에서부터 나는 구불구불 거리며, 옛날과 똑같이 그 길을 따라가야 했다. 차는 고개를 숨가쁘게 오르내리고, 강의 굴곡을 거역하지 않은 채, 이리저리 휘어지며 태백으로 간다.

가는 내내 강원도의 풍경이 낮아졌다 높아지며 차창으로 함께 한다. 운전하는 아내는 힘들었겠지만 차창의 풍경을 시선에 주워담기 바쁜 나는 내가 빠르고 편안하게 영월까지 오는 동안 잃어버렸던 그 무엇인가를 그 길에서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유일사 입구에서 태백산으로 오르는 첫발을 뗄 때, 나의 마음은 이미 그 뿌듯한 충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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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유일사 입구에서 우리는 다소 놀랐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관광버스 행렬과 주차장을 가득 메운 그 많은 차 때문이었다. 차를 세웠다기보다 간신히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유일사 입구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중간까지는 아주 길이 넓고 좋다. 그리고 그 뒤로는 구불구불한 산길이 이어진다. 태백산의 유일산 입구 등산로는 현대적인 영월까지의 새 도로와 영월에서 태백까지의 옛 도로를 그대로 닮았다.

그 길의 초입에 오늘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차림새가 모두 등산복이란 것을 제외하고 나면 혹시 태백산 꼭대기에 출근길의 지하철역이 있는 것은 아닐까 덜컥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듯 많은 인파 속에 묻혀 밀려가듯 오르는 산행은 그 나름의 맛이 있다.

이렇게 산을 오르면, 제 체력으로 산을 오르기 어려운 사람들도 자기도 모르게 그 많은 인파 속에 묻혀 얼떨결에 정상까지 갈 수 있다. 뒷사람이 떼는 한 발이 앞사람의 등을 밀어주고 앞사람이 떼는 한 발은 뒷사람의 발길을 끌어준다.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 번잡하긴 했지만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이 함께 산을 오르는 장면은 한편으로 흐뭇했고, 우리 일행도 그 속에 묻혀 즐겁게 산을 올랐다. 또 그 많은 사람을 모두 다 받아주는 태백산의 넉넉함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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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정상에 오른 기쁨이 산이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풍경을 안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강원도의 옛길처럼 뽀드득거리며 발밑에 밟히는 눈 소리를 들으며 호젓하게 천천히 오르는 산길의 즐거움도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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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태백산의 명물 중 하나는 등산길의 여기저기서 만나는 주목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은 그 무궁한 세월로 제 몸을 키워 태백산의 풍경을 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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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꽃은 원래 저 깊은 땅속에서 색깔을 길어 올려 피는 것이련만 눈꽃은 물길마저 숨을 죽인 한겨울에 허공을 날던 물알갱이를 가지 끝에 모아 피어난다. 겨울의 태백산 꼭대기 칼바람 속엔 하얀 꽃가루가 날아다니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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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태백산의 정상 장군봉 가는 길. 겨울엔 붉은 주단이 아니라 희디흰 눈비단을 깔아서 사람들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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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태백산 정상의 눈꽃. 정상은 오르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눈꽃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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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높이를 얻었을 때의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시선을 거리낌 없이 멀리까지 날려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선이 멀리 날면 그 순간 가슴이 시원해진다. 높은 곳에서 우리의 시선이 그냥 멀리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날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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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눈꽃은 바람이 찰수록 더욱 오래간다. 태백산 정상의 바람은 매서웠지만 눈꽃의 한가운데서 그 아름다움에 취하면 누구나 잠시 겨울 추위를 잊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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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나뭇가지는 봄과 여름에는 푸른 잎의 자리이고, 가을엔 단풍의 자리이다. 겨울엔 대부분 그 자리를 휑한 하늘로 채워두지만 때를 잘 맞추면 잠시 그 빈자리를 찾아온 눈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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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내려오는 길에 늦은 오후의 햇볕이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제 얼굴을 내밀며 계속 나를 따라왔다. 태양과 안녕을 고한 뒤에는 고향 친구 엄기탁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 사람들과 함께 태백에 내려왔는데 저녁으로 같이 하기에 좋은 게 뭐 없느냐고 물었다.

기탁이는 영월 읍내로 들어가서 청산회관의 곤드레밥을 대접하라고 권해주고는 예약까지 해주었다. 저녁값은 같이 간 서울의 진표 네가 냈다. 모두가 맛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즐거워하니 고향으로 안내한 나도 행복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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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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