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말리지 못했던 의지의 여인들

[서평] 비키레온의 <르네상스의 못 말리는 여자들>

등록 2006.02.09 08:54수정 2006.02.0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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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는 '못 말리는 여자들'이라는 표현이 못 마땅해 했다. 고대와 중세에 이어 르네상스시대 여인들을 보니 그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쓴 비키 레온은 숨겨진 여인들의 역사를 들어내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지, 역사 속 여인들을 옹호하려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한 의지의 여인들이, 역사 속에서 이렇게 숨쉬고 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의지'는 정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많은 역사가 남성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로인해 여성들의 역사적 위치가 불리하게 자리 매김 되어진 부분에 있어서는 형평성을 갖고자 노력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못 말리는 여자들> 표지 입니다.
<르네상스의 못 말리는 여자들> 표지 입니다.꼬마이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창의적인 활동과 학문이 기운차게 일어났어. 기도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타트 사이의 갈등이 심했어. 종교개혁의 결과 탄생한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교회와 오랫동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어. 이 시대를 살던 여자들은 고대나 중세에 누렸던 지위를 잃기도 했고, 전 유럽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마녀 사냥의 주요 표적이 되기도 했어."

백년전쟁을 종식시킨, 잔 다르크(1412~1431)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순수한 신앙심으로 나라를 위해 싸웠으나, 자신이 싸워 지키고 보호하려 했던 프랑스에 배신당한다. 목적을 달성한 프랑스 왕은 비천한 출신이 그녀를 구출하거나 보호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현상금에 눈이 어두운 프랑스 병사들은 '오를레앙의 처녀'를 영국군에게 넘긴다. 그녀는 고문 끝에 화형당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영국을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만든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여인들의 얽히고설킨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는 '천일의 앤'이란 영화로도 유명한 핸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다. 핸리 8세의 첫째 부인 캐서린은 스페인 여왕 이사벨의 막내딸이다. 우리에게도 왕가들의 정략적 혼인관계를 볼 수 있는 데, 기독교를 중심으로 뭉친 유럽의 경우, 이런 현상은 더욱 흔히 볼 수 있었다.

이사벨((1451~1504)여왕은 콜럼버스를 후원한 여왕으로 유명하다. 이사벨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카스타야 왕국의 공주였다.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오빠의 음모를 물리치고 아라곤 공국의 왕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신의 땅을 남편에게 주지 않고 자기가 권리를 가지면서 독립적으로 통치했다. 나중엔 통일 왕국을 이룩해 스페인(에스파냐)이 된다.

이사벨과 남편 페르난도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자신들의 영토에 가톨릭 신자만을 남길 생각이었다. '국토 회복 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700년동안 스페인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무어인(이슬람교도)들을 쫓아냈다. 무어인들에 이어 유대인들도 쫓아냈다. 이런 유대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종교 재판소'가 생겨났다. 종교 재판소는 유대인, 무어인 뿐 아니라 마녀나 이단 혐의를 씌워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처벌했다. 이것은 이사벨 여왕의 업적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핸리 8세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어머니인 평민 출신 앤 불린과 사랑에 빠져, 캐서린과 이혼하고 싶어 했다. 당시 영국은 엄격한 교리를 따랐기 때문에 왕이라고 해도 절대 이혼을 할 수 없었다. 핸리 8세는 고민 끝에 당시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토머스 모어(<유토피아>의 저자)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올곧은 사람이었던 토머스 모어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반대했고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이런 토머스 모어에겐 정신적인 동반자인 딸 마가렛(1505~1544)이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어려운 번역 작업을 했고 영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영국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었다면 아일랜드에는 그레이스 오말리(1530~1603)라는 해적 여왕이 있었다. 그녀는 열 살 때 선장이 되어 지휘했다. 결혼한 뒤에는 해적 선단을 이끌며 해적질을 했다.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일랜드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레이스는 이에 맞서 반란군 대장이 되어 끈질기게 저항한다. 이 둘은 직접 만나기도 했다. 결국, 아일랜드의 독립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지금도 아일랜드와 신대륙에서는 아일랜드의 위대한 해적 여왕이자 자유 투사로 오말리를 기억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 여성 인물로, 황진희(1500)와 민회빈 강(1611~1695)씨가 있다. 민회빈 강씨는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의 부인이었다.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된다. 전쟁에 패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그 부인들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보낸다. 영리한 민회빈 강씨는 그 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무역으로 경제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는 한편,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노예가 아닌 농민으로 살도록 도왔다. 조선으로 돌아와서 경제적인 힘을 통해 자신과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고 했으나, 청나라 정책에 순응한 것으로 인조에게 오해를 받는다. 결국 소현세자가 죽게 되고 그녀 또한 궁 밖으로 쫓겨나 사약을 받는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동시대 과학자로는 소피 브라헤(1556~1643) 가 있다. 그녀는 덴마크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의 동생이다. 소피는 별에 대한 연구는 물론 화학, 의학, 원예 공부를 하였고 다른 나라에서도 인정받는 생물학 및 식물 전문가였다. 그녀는 무능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경제적 파탄에 이르자, 생계를 위해 별점을 쳐서 먹고 살았다. 유명한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도 소피처럼 별 점을 쳐서 돈을 벌었다고 하니, 천문학자들이 점치는 일이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닌 듯 하다.

이사벨여왕 이후 스페인은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남아메리카 정복에 나선 스페인 장군의 코르테스를 도운 통역사이자 조언가는 노예였던 말리날리(1530~1603) 이다. 그녀는 유카탄 반도의 북쪽 끝, 마야족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린시절, 이 부족 저 부족에게 노예로 넘겨졌다. 그러는 가운데 여러 부족의 언어와 풍습을 배웠다. 그런 그녀의 도움으로 코르테스는 몇 안 되는 군인으로 아스테크와 멕시코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말리날리보다 더 큰 '비밀 병기'는 유럽 사람들을 따라온 천연두였지만 말이다.


후아나(1651~1695)의 부모는 스페인이 멕시코를 지배하던 때에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후아나는 스페인 왕실까지 가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엔, 여성이 학자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선 수녀가 되는 길 밖에는 없었다. 후아나는 여성이 학문을 탐한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종교 재판까지 받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후아나는 1695년 멕시코시티를 휩쓸기 시작한 페스트 환자들을 밤낮없이 돌보다, 감염되어 죽었다.

1500년대에서 1800년대 사이의 유럽에서는 남자 옷을 입고 남자 행세를 하는 젊은 여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 카탈리나 데 에라우소(1585~1650)는 어려서 수녀원에 들어 갖지만, 도망 나와 뱃사람이 되었다가, 스페인군 대위가 되어 전쟁터에 나가 싸웠다. 남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몰 프린스(1589~1659)는 거칠고 험악한 암흑가를 장악한 여인이다. 그녀가 태어난 시기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쳐부순 기쁨으로 들떠 있던 때였다. 그녀들은 비록 모범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유명인으로 생각했다.

르네상스 미술계엔 이탈리아 천재 화가 엘리자베타 시라니(1638~1665)가 있다. 그녀는 화가였던 아버지에게 미술 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로부터 모든 사생활을 침해당하고 27세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당시, 엘리자베타 말고도 '소포니스바 안구이솔라'와 '아프테미스아 젠틸레스키'가 여류화가로 유명했다. 특히, 아프테미스아의 그림 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라는 작품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감정을 그림에 실어, 인상 깊게 다가온다.

특이한 인물은 스웨덴의 황금시대를 연, 크리스티나 여왕(1626~1689)이었다.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난 그녀는 개성이 강하고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왕위를 사촌 오빠에게 물려주고 가톨릭으로 종교를 바꾼 뒤 예술과 학문에 관심을 쏟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창의적인 활동과 학문이 장이 열렸지만 여성들에게선 역동적인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지배층 여성들이 종교적 권위를 신봉했고, 학문적 성과는 남성들의 업적에 묻혀버렸다.

르네상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던 인물은 말리나리나 몰 프리스, 카탈리나 데 에라우소, 하슬라 같은 하층민 여인들에게서였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서 기질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체 여인들에 비해 미약한 사례이기는 하나, 고대나 중세에서는 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으로, 새로운 기회를 제공되고 있으며,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중학생들과 초등 고학년들도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시대적 사건이나 인물을 연결하여 마인드맵 형태로 그려나가며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세권의 책을 읽고 다른 책이나 영화를 통해 역사적 사건들을 대하게 되면, 시대적 흐름 파악이나 얼개 짜기가 쉬어지고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화려하게만 보였던 역사 속 여인들의 상처를 들여다보면서, 오늘 내게 처한 현실을 극복하는 힘을 얻게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르네상스의 못 말리는 여자들/비키레온 지음/꼬마이실펴냄

리더스 가이드와 알라딘에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르네상스의 못 말리는 여자들/비키레온 지음/꼬마이실펴냄

리더스 가이드와 알라딘에 실었습니다.

르네상스의 못 말리는 여자들 -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

비키 레온 지음, 최재호 그림, 손명희 옮김,
꼬마이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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