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밥을 두 그릇이나 얻었습니다

우리집에 찾아든 오곡밥 이웃 인심

등록 2006.02.12 08:25수정 2006.02.1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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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은 음력 설날 이후 보름 동안 들뜬 마음을 정리하고 한해의 강복을 기원하는 세시풍습입니다. 같은 음력 보름 명절인 한가위가 수확한 햇곡식을 놓고 기쁨을 나누는 것이라면 정월대보름은 곤궁하고 제철 나물을 구하기 어려운 겨울, 영양보충과 미각을 돋우기 위함 정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a 이웃 어르신들이 맛 보라고 주신 오곡밥과 갖은 나물.

이웃 어르신들이 맛 보라고 주신 오곡밥과 갖은 나물. ⓒ 유성호

때문에 온갖 햇과일과 햇곡식이 넘쳐나는 한가위보다는 펼쳐 놓을 것이 부족합니다. 대부분 가을걷이 후 겨울나기를 위해 저장해 둔 곡식들이고 나물들 역시 말린 것들입니다. 예전에는 이것마저 귀하던 시절이라 감지덕지하며 대보름이 기다려지곤 했는데, 이제는 언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라 귀히 여겨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이 세시풍습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맥을 잇는 것에 소홀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말씀은 평상시에는 안 하시지만 명절날 음식을 만들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냅니다. 듣자면 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있는 집에서는 잔소리는 듣지만 맛난 오곡밥과 갖은 나물을 맛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결혼과 함께 분가를 해서 살다 보니 대보름날 부지런히 움직이던 어머니의 손맛이 그립습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슬고슬한 오곡밥과 볶고 버무리고 무치던 아홉 가지 나물들. 때로는 한 가지 곡식이 빠지고 몇 가지 나물들이 채워지지 않더라도 해를 거르지 않던 정성스런 그 맛.

올해도 대보름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쌉쌀한 나물 맛이 입안을 적시지만 집에서 해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포기하고 있는 초저녁, 초인종이 울립니다. 문을 빨쪽 열자 빌라 아래층에 사시는 할머니께서 쟁반에 받쳐 든 오곡밥과 나물 한 보시기를 내미시며 맛 좀 보라고 합니다. 꿈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하더니만 금방 현실로 나타납니다. 어르신을 포함해 삼대가 모여 살면서 때마다 세시 음식을 하십니다.

a 음식에도 휘영청 달이 떳습니다. 나눔의 보름달입니다. 보이시죠?

음식에도 휘영청 달이 떳습니다. 나눔의 보름달입니다. 보이시죠? ⓒ 유성호

지난번 총각김치와 김장김치, 그리고 틈틈이 잊지 않고 우리 가족을 챙겨 주시는 고마우신 분입니다. 참 맛나고 감사하다고 하면 언제나 젊은 사람들은 잘 해먹지 않을 것 같아 좀 넉넉히 했다 하시며 입가의 잔주름을 펴시며 웃습니다. 설날은 집을 비워서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도 우리 집의 인기척에 귀를 세우고 계셨을 것입니다.


늦은 점심으로 시장기는 없었지만 나물에서 풍겨나는 참기름 향을 맡다 보니 저절로 젓가락을 쥐게 됩니다. 시래기, 고사리, 고구마 줄거리, 시금치 나물을 볶고 무쳐 오셨습니다. 사실 시금치는 아홉 가지 나물에 들어가지 않는데, 감지덕지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대보름에 먹은 나물에는 이들과 함께 무, 호박고지, 가지, 도라지, 취, 콩나물 등이 있답니다.

a 불암산에 뜬 정월대보름달(졸작 스케치).

불암산에 뜬 정월대보름달(졸작 스케치). ⓒ 유성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향긋한 나물에 심취해 있기를 10분 정도, 또 다시 초인종이 울립니다. 이번엔 바로 옆집 할머니께서 녹색 쟁반, 청자 빛 자기그릇에 오곡밥을 담아 오셨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의 정성이 감격스러웠습니다. 두 집의 음식이 빛깔부터 확연히 다릅니다. 또 나물의 구성 역시 달라 이번 것은 무말랭이와 고춧잎을 함께 볶은 것과 콩나물, 시금치, 시래기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가을 무렵부터 창틀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말리던 시래기, 그리고 바닥에서 차에 짓밟히는 수모(?)를 견뎌가며 애지중지 말리던 무말랭이를 떠올리면서 어르신들의 정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날 가장 미각을 자극한 것은 꼬들꼬들한 무말랭입니다. 시련을 견디면서 옹골차고 쫀득거리게 말려졌나 봅니다.

아파트에서 빌라로 이사 오면서 불편한 점이 있다면 집안에서 대보름달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멀리 불암산 정상 위로 훌쩍 정월대보름 노릇한 달덩이가 걸려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웃집 어르신들이 나눠주신 오곡밥과 갖은 나물 속에는 더 크고 따뜻한 나눔의 보름달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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