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변호사 '희망제작소'로 새 운동 시작

거대 담론 대신 실천 가능한 아이디어 수립 정리 공유

등록 2006.02.13 14:12수정 2006.02.1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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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욕심이라곤 좀체 들어갈 구석이 없어 보이는 박원순(50) 변호사는 어찌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욕심과 야망이 큰 사람이다. 90년대 중반 참여연대를 통해 시민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고, 2000년 나눔 운동의 대중화를 기치로 내건 아름다운재단을 맡아(총괄 상임이사)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가고 있다.

그런 그가 봄이 본격 시작되는 3월 '희망제작소'를 열어 우리 사회에 대안적 제안들을 하고 또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중개인'이 된단다. 과연 지인들이 평하듯 '여러 문제 연구소장'에서 '온 나라 문제 연구소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그런 자신에 대해 "(해외에 나가) 자꾸 세상을 보며 저거 우리 한국에 가져와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차고 넘쳐 주체할 수 없다"며 "열정이 지나쳐도 괴롭다"고 토로한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그의 사무실, 듬성하게 세 쪽으로 맞춰진 나무 탁자에 앉으면 서울·뉴욕·베를린·캘리포니아 현지 시간에 맞춰진 네 개의 벽시계를 마주하게 된다. 괴로움 아닌 괴로움인 그의 열정을 들으면서 '저 벽시계는 앞으로 몇 개나 늘어날까', 잠시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4일 토요일 늦은 5시에 박 변호사와 만나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나갈까 하는 '소셜 디자인(social design)'에 대한 생각을 듣고, 그 큰 구도 안에서 시민운동과 여성운동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 진보진영의 싱크탱크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희망제작소' 출범을 앞두고 있다. 다른 정책연구소와 어떻게 다른가.
"희망제작소는 거대 담론보다는, 좀 더 나은 우리 사회를 위한 실천 가능한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정리하며 공유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정책을 만들고 어젠다를 수립해 정부 등에 적극 제안할 계획이다. 연구도 하고 프로젝트를 통해 돈도 만들고 또 운동도 하는, 이런 민간연구소는 이제까진 없었다. 따라서 전문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시대에 대한 분석과 열정이다. 현재 20여 명이 준비 중인데, 그 중 박사학위 소지자는 두세 명에 불과하다."

- 연구소 오픈을 준비하는 인력 중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다고 들었다.
"특히 비영리기관엔 여성인력이 늘, 어디서나 더 많다. 아름다운재단만 해도 80∼90%가 여성이다. 정부·기업 등은 여성이 진입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반면, 비영리 쪽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 열정과 의지, 헌신 등의 '어루만지는 역할'이 잘 맞는 것 같다."

- 아름다운재단 미국 지부를 위해 최근 미국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성과가 있었나..
"지난해 7개월간 스탠퍼드대에서 강의하면서 6월 아름다운재단 북가주 지부가 탄생했다. 올 4월 8일엔 뉴욕 지부가 탄생한다. LA, 시애틀 등지에도 계속 지부가 생겨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고로 기부문화가 발전한 나라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교포사회엔 기부문화가 그다지 확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재단 미국 지부들이 교포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한다."


- 지난 2002년 펴낸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나눔'엔 "1% 나눔은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이란 아름다운재단 창립 취지에 대한 확신이 곳곳에 녹아 있다. 책은 나눔 운동의 복음서, 변호사님은 전도사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을 내 식대로 해석한다면 '인간은 협동해 더불어 사는 동물'이다. 서로 나누고 배우고 성장 기여하며 힘을 합치는 존재다. 아름다운재단의 1% 나눔운동을 통해 누적된 기금이 80억 원을 넘어섰는데, 구둣방을 해서 혹은 1급 장애인이 정부지원금 중 일부를 나누는 등 기금 하나하나마다 참 기막힌 사연들이 많다. 농사꾼 전우익 선생님이 쓴 나눔 체험의 편지모음집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제목 그대로다."(아름다운재단은 전우익씨 책 제목을 그대로 따서 빈곤·오지 지역에 도서를 지원하는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기금을 실제로 만들었다)

- 여성운동엔 기금 모금에 대한 전략적 고민이 참 많다. 아름다운재단의 성공적인 활동을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참여연대 때도 그렇고 실무자들에게 드는 내 단골 비유가 있다. 바로 '명동 할머니' 얘기다. 명동 할머니처럼 신문기사 등을 오려놓고 마음에 담고 있다가 몇 십 년 후 자신이 평생 모은 큰 돈을 쾌척하는 백마 탄 기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웃음). 늘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여성 이슈를 일반 대중에 각인시킬 수 있도록 좀 더 분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명동 할머니 같은 기부자를 위한 훈련도 필요하다. 감상적 기부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부를 할 수 있도록. 내가 모은 이 돈으로 우리 사는 세상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 전략적 고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도 많이 받았을 텐데.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까봐 가장 겁내 한 사람은 바로 아내다(웃음). 시민운동 하는 남편을 대신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생활을 꾸려온 아내 입장에선 자신의 헌신과 노력이 헛되게 되지 않을까. 허망한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시민운동계 리더론 이제 최열 선생과 나 정도가 남았는데. 경험을 쌓아가고 나이가 들다 보면 내 몸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민운동이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고,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 기대감을 갖도록 한다. 앞으로 한 5년간 열심히 일할 생각이다."

- 정계에 진출하는 여성 리더가 많아지면서 여성운동 위기설이 일었다. 어떻게 보는가.
"시민운동, 여성운동을 한 리더들은 다른 분야 출신들보다 공익과 자기희생 측면에서 훨씬 모범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분들이 정계로 진입한 뒤 공백을 메울 충원이 어렵다는 것과 정계 생활 후 다시 운동권으로 돌아오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러나 70년대 미국 존슨 행정부 시절 존 가드너가 보건복지부 장관 퇴임 후 '커먼코즈'(common cause)를 만들어 돈과 정치의 결탁을 막는 정치적 시민운동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그런 방향으로 시민운동계 리더들이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 호주제라는 공동의 큰 장벽이 없어지면서 이후 여성 과제에 대한 고민이 많다.
"시민운동이나 여성운동 자체가 엘리트적 측면이 있다. 지금의 시민운동 역시 국민을 감동시키는 버전과 콘텐츠가 없다는 점에서 위기라고 생각한다. 여성운동이 일반 여성들의 삶 속으로, 그들의 절망과 눈물 속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어젠다가 나올 것이라 확신한다. 여전히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행태가 남아 있듯이 호주제가 폐지됐다 해서 여성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늘 재단 직원 면접을 봤다. 한 여성 지원자가 그러더라.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오장육부에 모래주머니가 달린 것 같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여성 어젠다의 콘텐츠가 좀 더 정교해지고 세밀해져 갈 것이다."

- 요즘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 진출을 보면서 역차별을 말하는 남성들도 있다.
"91년이든가, 영국 런던대 연수 중에 인상적인 사건을 접했다. 당시 여성이 경찰청장이 될 차례였는데 승진이 안 되자 그 여성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이 소송을 또 하나의 국가기관인 기회균등위원회(EOC: the Equal Opportunities Commmission)가 지원했다. 한편으론 재미있고, 한편으론 영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이런 차별이 있구나 생각했었다. 결혼과 육아, 의사결정 등 여성을 둘러싼 사회문화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제도가 변화한다고 해서 남성과 동등하게 경쟁할 조건이 돼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박원순 변호사는
'안식'하지 않는 운동가로 남고 싶다

박원순 변호사에게 어떻게 그처럼 민주적이고 양성 평등적인 마인드를 가지게 됐냐고 묻자 그는 대뜸 "제가 경상도(경남 창녕) 남잡니다"란 말부터 꺼냈다. 위로 누님 네 분과 아래로 누이동생 한 명이 있는, 남아선호사상이 지극했던 집안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는 것. 그러나 그 자신 몸소 체험을 통해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누구든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함께 하면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은 가족 사회학자 이효재 선생이다. 이 선생은 교수(이화여대 사회학과)로 재직하다, 정년퇴임 후엔 여성운동(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발족)에 뛰어들었다. 이후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내놓고 진해로 귀향한 후엔 지역공동체를 위해 재단을 설립하는 등 평생 운동가로 안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다.

박 변호사는 경기고 졸업 후 서울대 법대에 진학, 대학 시절 유신독재 항거시위에 참여했다 투옥, 제적됐다. 이후 80년 사법고시에 합격,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잠깐 일한다. 이후 고 조영래 변호사의 영향으로 80∼90년대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자리매김한다. 시민운동에 적극 뛰어들게 된 것도 조 변호사를 병문안 갔다가 "돈 그만 벌고 이젠 눈 좀 돌려봐"란 조언을 들으면서부터였다.

94년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2000년 4·13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를 결성해 국회의원 부적격자에 대한 낙선운동을 펼치고 소액주주운동 등을 전개하는 등 시민운동에 큰 바람을 일으켰다.

박 변호사와 여성인권 사건들

박원순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중 유달리 여성인권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들과 인연이 많다. 애정도 비례한다. 지금도 당시 각 사건에 대한 에피소드와 자신이 쓴 변론문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

가장 최근 사건은 우리 사회에 황혼이혼의 물꼬를 트고 노인여성의 인권문제를 부각시킨 이시형 할머니 소송. 98년 가정법원에 의해 남편과 이혼소송에서 패소한 할머니를 여성신문이 기사화하고 지원사업이 전개되면서 박 변호사가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해 소송을 지원했던 것.

이 소송은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당시 "죽을 때까지 해로하시라"란 법원의 무감각한 판결에 심각한 문제를 느꼈던 박 변호사는 이 사건이 "가부장적 결혼관에 의한 억압적 삶에 대한 거부란 점에서 젊은 세대에도 상징적 효과가 높았다"고 평가한다.

성희롱 사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은 그가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접한 사건. 당시만 해도 이런 사건이 법적 소송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는 관련 여성단체들에 빨리 소송 준비를 하라고 권했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 동안 모아놓은 관련 자료가 많았기에 손해배상청구란 민사소송으로 방향을 잡았고, 서울고법에서의 패소 등 참담한 결과를 겪으면서도 6년여를 소송에 매달렸다.

결국 대법원으로부터 "상대방의 인격권과 존엄성을 훼손하고 정신적 고통을 주는 정도라면 위법"이란 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성희롱 개념을 재 정의하는 성과를 낳았다. 이로써 당시 공동변호인으로 활동했던 이종걸·최은순 변호사와 함께 98년 여성연합으로부터 열 번째 여성운동상 수상자가 됐다.

그가 아직도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우 조교를 집으로 데려와 며칠 동안 함께 있으면서 상고 이유서를 작성했던 것. 당시 갓 결혼한 우 조교는 시부모가 싫어하는데도 끝까지 소송을 강행하는 인내심을 보여줬고 박 변호사는 자신과 여성운동계가 우 조교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부천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도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맡아 활동했다.

이들 소송을 진행하면서 그가 절감한 것은 "역사에서 큰 변화의 물줄기가 있을 땐 이를 가능케 하는 한 사건, 한 인간이 있다"는 것. 이에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Elie Wissel)의 회고록에 나오는 한 구절을 즐겨 인용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 받고 수난 받는 인간이 이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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