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
욕심이라곤 좀체 들어갈 구석이 없어 보이는 박원순(50) 변호사는 어찌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욕심과 야망이 큰 사람이다. 90년대 중반 참여연대를 통해 시민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고, 2000년 나눔 운동의 대중화를 기치로 내건 아름다운재단을 맡아(총괄 상임이사)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가고 있다.
그런 그가 봄이 본격 시작되는 3월 '희망제작소'를 열어 우리 사회에 대안적 제안들을 하고 또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중개인'이 된단다. 과연 지인들이 평하듯 '여러 문제 연구소장'에서 '온 나라 문제 연구소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그런 자신에 대해 "(해외에 나가) 자꾸 세상을 보며 저거 우리 한국에 가져와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차고 넘쳐 주체할 수 없다"며 "열정이 지나쳐도 괴롭다"고 토로한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그의 사무실, 듬성하게 세 쪽으로 맞춰진 나무 탁자에 앉으면 서울·뉴욕·베를린·캘리포니아 현지 시간에 맞춰진 네 개의 벽시계를 마주하게 된다. 괴로움 아닌 괴로움인 그의 열정을 들으면서 '저 벽시계는 앞으로 몇 개나 늘어날까', 잠시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4일 토요일 늦은 5시에 박 변호사와 만나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나갈까 하는 '소셜 디자인(social design)'에 대한 생각을 듣고, 그 큰 구도 안에서 시민운동과 여성운동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 진보진영의 싱크탱크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희망제작소' 출범을 앞두고 있다. 다른 정책연구소와 어떻게 다른가.
"희망제작소는 거대 담론보다는, 좀 더 나은 우리 사회를 위한 실천 가능한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정리하며 공유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정책을 만들고 어젠다를 수립해 정부 등에 적극 제안할 계획이다. 연구도 하고 프로젝트를 통해 돈도 만들고 또 운동도 하는, 이런 민간연구소는 이제까진 없었다. 따라서 전문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시대에 대한 분석과 열정이다. 현재 20여 명이 준비 중인데, 그 중 박사학위 소지자는 두세 명에 불과하다."
- 연구소 오픈을 준비하는 인력 중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다고 들었다.
"특히 비영리기관엔 여성인력이 늘, 어디서나 더 많다. 아름다운재단만 해도 80∼90%가 여성이다. 정부·기업 등은 여성이 진입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반면, 비영리 쪽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 열정과 의지, 헌신 등의 '어루만지는 역할'이 잘 맞는 것 같다."
- 아름다운재단 미국 지부를 위해 최근 미국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성과가 있었나..
"지난해 7개월간 스탠퍼드대에서 강의하면서 6월 아름다운재단 북가주 지부가 탄생했다. 올 4월 8일엔 뉴욕 지부가 탄생한다. LA, 시애틀 등지에도 계속 지부가 생겨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고로 기부문화가 발전한 나라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교포사회엔 기부문화가 그다지 확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재단 미국 지부들이 교포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한다."
- 지난 2002년 펴낸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나눔'엔 "1% 나눔은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이란 아름다운재단 창립 취지에 대한 확신이 곳곳에 녹아 있다. 책은 나눔 운동의 복음서, 변호사님은 전도사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을 내 식대로 해석한다면 '인간은 협동해 더불어 사는 동물'이다. 서로 나누고 배우고 성장 기여하며 힘을 합치는 존재다. 아름다운재단의 1% 나눔운동을 통해 누적된 기금이 80억 원을 넘어섰는데, 구둣방을 해서 혹은 1급 장애인이 정부지원금 중 일부를 나누는 등 기금 하나하나마다 참 기막힌 사연들이 많다. 농사꾼 전우익 선생님이 쓴 나눔 체험의 편지모음집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제목 그대로다."(아름다운재단은 전우익씨 책 제목을 그대로 따서 빈곤·오지 지역에 도서를 지원하는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기금을 실제로 만들었다)
- 여성운동엔 기금 모금에 대한 전략적 고민이 참 많다. 아름다운재단의 성공적인 활동을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참여연대 때도 그렇고 실무자들에게 드는 내 단골 비유가 있다. 바로 '명동 할머니' 얘기다. 명동 할머니처럼 신문기사 등을 오려놓고 마음에 담고 있다가 몇 십 년 후 자신이 평생 모은 큰 돈을 쾌척하는 백마 탄 기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웃음). 늘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여성 이슈를 일반 대중에 각인시킬 수 있도록 좀 더 분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명동 할머니 같은 기부자를 위한 훈련도 필요하다. 감상적 기부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부를 할 수 있도록. 내가 모은 이 돈으로 우리 사는 세상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 전략적 고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도 많이 받았을 텐데.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까봐 가장 겁내 한 사람은 바로 아내다(웃음). 시민운동 하는 남편을 대신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생활을 꾸려온 아내 입장에선 자신의 헌신과 노력이 헛되게 되지 않을까. 허망한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시민운동계 리더론 이제 최열 선생과 나 정도가 남았는데. 경험을 쌓아가고 나이가 들다 보면 내 몸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민운동이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고,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 기대감을 갖도록 한다. 앞으로 한 5년간 열심히 일할 생각이다."
- 정계에 진출하는 여성 리더가 많아지면서 여성운동 위기설이 일었다. 어떻게 보는가.
"시민운동, 여성운동을 한 리더들은 다른 분야 출신들보다 공익과 자기희생 측면에서 훨씬 모범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분들이 정계로 진입한 뒤 공백을 메울 충원이 어렵다는 것과 정계 생활 후 다시 운동권으로 돌아오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러나 70년대 미국 존슨 행정부 시절 존 가드너가 보건복지부 장관 퇴임 후 '커먼코즈'(common cause)를 만들어 돈과 정치의 결탁을 막는 정치적 시민운동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그런 방향으로 시민운동계 리더들이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 호주제라는 공동의 큰 장벽이 없어지면서 이후 여성 과제에 대한 고민이 많다.
"시민운동이나 여성운동 자체가 엘리트적 측면이 있다. 지금의 시민운동 역시 국민을 감동시키는 버전과 콘텐츠가 없다는 점에서 위기라고 생각한다. 여성운동이 일반 여성들의 삶 속으로, 그들의 절망과 눈물 속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어젠다가 나올 것이라 확신한다. 여전히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행태가 남아 있듯이 호주제가 폐지됐다 해서 여성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늘 재단 직원 면접을 봤다. 한 여성 지원자가 그러더라.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오장육부에 모래주머니가 달린 것 같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여성 어젠다의 콘텐츠가 좀 더 정교해지고 세밀해져 갈 것이다."
- 요즘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 진출을 보면서 역차별을 말하는 남성들도 있다.
"91년이든가, 영국 런던대 연수 중에 인상적인 사건을 접했다. 당시 여성이 경찰청장이 될 차례였는데 승진이 안 되자 그 여성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이 소송을 또 하나의 국가기관인 기회균등위원회(EOC: the Equal Opportunities Commmission)가 지원했다. 한편으론 재미있고, 한편으론 영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이런 차별이 있구나 생각했었다. 결혼과 육아, 의사결정 등 여성을 둘러싼 사회문화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제도가 변화한다고 해서 남성과 동등하게 경쟁할 조건이 돼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 박원순 변호사는 | | | '안식'하지 않는 운동가로 남고 싶다 | | | | 박원순 변호사에게 어떻게 그처럼 민주적이고 양성 평등적인 마인드를 가지게 됐냐고 묻자 그는 대뜸 "제가 경상도(경남 창녕) 남잡니다"란 말부터 꺼냈다. 위로 누님 네 분과 아래로 누이동생 한 명이 있는, 남아선호사상이 지극했던 집안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는 것. 그러나 그 자신 몸소 체험을 통해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누구든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함께 하면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은 가족 사회학자 이효재 선생이다. 이 선생은 교수(이화여대 사회학과)로 재직하다, 정년퇴임 후엔 여성운동(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발족)에 뛰어들었다. 이후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내놓고 진해로 귀향한 후엔 지역공동체를 위해 재단을 설립하는 등 평생 운동가로 안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다.
박 변호사는 경기고 졸업 후 서울대 법대에 진학, 대학 시절 유신독재 항거시위에 참여했다 투옥, 제적됐다. 이후 80년 사법고시에 합격,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잠깐 일한다. 이후 고 조영래 변호사의 영향으로 80∼90년대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자리매김한다. 시민운동에 적극 뛰어들게 된 것도 조 변호사를 병문안 갔다가 "돈 그만 벌고 이젠 눈 좀 돌려봐"란 조언을 들으면서부터였다.
94년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2000년 4·13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를 결성해 국회의원 부적격자에 대한 낙선운동을 펼치고 소액주주운동 등을 전개하는 등 시민운동에 큰 바람을 일으켰다. | | | | |
| | 박 변호사와 여성인권 사건들 | | | | 박원순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중 유달리 여성인권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들과 인연이 많다. 애정도 비례한다. 지금도 당시 각 사건에 대한 에피소드와 자신이 쓴 변론문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
가장 최근 사건은 우리 사회에 황혼이혼의 물꼬를 트고 노인여성의 인권문제를 부각시킨 이시형 할머니 소송. 98년 가정법원에 의해 남편과 이혼소송에서 패소한 할머니를 여성신문이 기사화하고 지원사업이 전개되면서 박 변호사가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해 소송을 지원했던 것.
이 소송은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당시 "죽을 때까지 해로하시라"란 법원의 무감각한 판결에 심각한 문제를 느꼈던 박 변호사는 이 사건이 "가부장적 결혼관에 의한 억압적 삶에 대한 거부란 점에서 젊은 세대에도 상징적 효과가 높았다"고 평가한다.
성희롱 사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은 그가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접한 사건. 당시만 해도 이런 사건이 법적 소송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는 관련 여성단체들에 빨리 소송 준비를 하라고 권했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 동안 모아놓은 관련 자료가 많았기에 손해배상청구란 민사소송으로 방향을 잡았고, 서울고법에서의 패소 등 참담한 결과를 겪으면서도 6년여를 소송에 매달렸다.
결국 대법원으로부터 "상대방의 인격권과 존엄성을 훼손하고 정신적 고통을 주는 정도라면 위법"이란 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성희롱 개념을 재 정의하는 성과를 낳았다. 이로써 당시 공동변호인으로 활동했던 이종걸·최은순 변호사와 함께 98년 여성연합으로부터 열 번째 여성운동상 수상자가 됐다.
그가 아직도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우 조교를 집으로 데려와 며칠 동안 함께 있으면서 상고 이유서를 작성했던 것. 당시 갓 결혼한 우 조교는 시부모가 싫어하는데도 끝까지 소송을 강행하는 인내심을 보여줬고 박 변호사는 자신과 여성운동계가 우 조교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부천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도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맡아 활동했다.
이들 소송을 진행하면서 그가 절감한 것은 "역사에서 큰 변화의 물줄기가 있을 땐 이를 가능케 하는 한 사건, 한 인간이 있다"는 것. 이에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Elie Wissel)의 회고록에 나오는 한 구절을 즐겨 인용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 받고 수난 받는 인간이 이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라는.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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