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축구와 식민통치의 기억

분단된 두 정부가 일본전 승리에 집착하는 까닭

등록 2006.02.14 15:51수정 2006.02.1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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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독립기념관에 내 걸린 초대형 붉은 악마 포스터와 태극기

독립기념관에 내 걸린 초대형 붉은 악마 포스터와 태극기 ⓒ 가이 포달러

2005년 2월과 6월, 월드컵 본선진출팀을 결정하는 최종예선전에서 일본과 북한이 만났다. 감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 두 경기를 지켜보며 세계는 익숙한 주제인 스포츠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다시 한 번 떠올렸고 일제시대 이후 한국 축구의 정치성, 한일간의 갈등은 물론 남북한이 현대정치에 과거사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

정치와 축구의 상관관계가 처음 대두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 재임기간(1948~1960) 중 이었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에 예정된 한·일간 축구경기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 양국 대표팀은 원래 홈경기와 원정경기 방식으로 스위스 월드컵 최종예선에 출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일본의 식민통치자들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밟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두 경기 모두 결국 일본에서 열렸고, 이승만 대통령은 선수들에게 승리해서 당당하게 돌아오거나 아니면 "동해에 빠져 죽을 것"을 '충고'했다고 전한다[1]. 한국 선수들은 첫 경기에서 5-1로 승리를 거뒀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2-2로 동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양국간 스포츠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전세계가 주목하게 된 계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한국 축구, 투지 그리고 정통성

갖가지 색으로 얼굴을 칠하고 붉은 티셔츠를 입은 한국 대표팀의 응원단을 부르는 '붉은 악마'의 이미지가 월드컵 기간에 국내외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심지어 월드컵 이후에는 교과서에도 붉은 악마의 사진이 실렸다. 2002년 여름, 일제식민지배시대를 되새기기 위한 기념비적 장소인 독립기념관에는 축구대표팀을 응원하는 '붉은 악마'의 초대형 포스터가 걸렸다. '겨레의 집' 대형 벽에 걸린 이 포스터는 자그마치 길이 126m에 높이가 45m나 되며 독립기념관에서 가장 상징적인 15m 높이 조형물인 '불굴의 한국인상'을 내려보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2002년의 스포츠 행사로 고양된 국민적 자부심과 반식민주의 투쟁정신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관계라는 사실과 부수적으로 한국이 스스로를 분단 이전 대한민국의 계승자로 내세운다는 것이다.

북한으로 눈을 돌려보면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째는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과 그의 가족이 관련된 내용 외에는 일본의 침략만 다루는 이벤트나 인물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 스포츠의 본질이다. 북한은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의 '신체적 문화'와 스포츠를 이용해 단체에 대한 의식과 결속력을 고양시켜 국가건설에 스포츠를 이용하는 실용주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이런 정책은 북한이 체제와 지도자를 중심으로 인민을 결속시키기 위해 연출하는 매스게임 공연을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북한은 일반적으로 일본을 향해 공격적인 어법을 구사하는데 '일본 반동주의'가 대표적인 예다. 일본인 납치사건으로 최근 양국간의 해묵은 역사적 긴장관계가 한층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축구대표팀은 2006년 독일월드컵 본선진출 티켓을 두고 최종예선에서 맞붙게 되었다.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첫 경기의 안전을 위해 일본축구협회는 평상시의 1.5배에 해당하는 1400명의 치안담당 요원을 투입해 2000명의 경찰과 함께 질서유지를 담당하게 했다. 또 양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서로 다른 시간에 경기장에 입장했으며, 북한 응원팀이 일본 응원팀과 직접 접촉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양 응원팀의 중간에 1000석의 자리를 비워뒀다.

북한 "일본 반동주의" 비난


일본은 첫 경기를 2-1로 이겼다. 그 무렵 국제축구연맹 FIFA가 북한에서 개최된 북한-이란전에서 보여준 북한 팬들의 태도를 문제 삼아 북한에 대한 징계를 고려하면서 감정적 대립이 고조되었다. 결국 FIFA는 북한이 평양 대신 일본과의 두 번째 경기를 제3의 개최지인 방콕에서 관중 없이 진행하도록 결정했다. 흥미롭게도 이 때 한국이 앞에 나서 형제국가인 북한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면서 FIFA가 결정을 철회하도록 설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은 두 번째 경기에서도 2-0으로 승리를 거뒀다.

북한은 두 번의 거듭된 패배를 모두 심판의 편파 판정 탓으로 받아들였다. 이란전에서는 편파적인 시리아 출신 심판이 그랬고 이어 우호적인 환경인 김일성 종합경기장에서 홈경기를 하지 못하도록 한 FIFA가 북한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스포츠 국수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최근에 있었던 또다른 스포츠 일화를 살펴보자.


축구에서 일본에 패한 것은 북한 내부뿐 아니라 북한을 지지하는 외부 세력에게도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재일 조선인이 바로 그들이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조선인 조직에 소속된 5000여명이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경기에서 북한을 응원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65만명에 달하는 한국교포 중에 '친북' 성향을 가진 조선인은 20~25만명으로 추산된다. 이 친북 단체는 "북한의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학교들과 기타 단체들의 연대를 유지"하고 있다[2]. 프로권투선수인 홍창수도 이 단체 소속이다.

홍창수 프로권투 선수

동경한국고등학교를 졸업한 홍창수 선수는 2000년도 슈퍼플라이급 세계복싱평의회(WBC) 세계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으며 2001년도에도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2000년 11월 동경에서 열린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행사에서 홍창수 선수는 영예로운 "북한 인민의 스포츠맨" 지위를 부여받았다. 2001년 6월 북한을 방문했을 때 홍선수는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환영행사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다음은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내용이다[3].

"일본에서 최초로 조선인 프로복싱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홍창수 선수가 오늘 이 곳에 도착했다. 일본내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일본 반동주의를 이겨내고, 홍선수는 손에는 조선인민주의공화국 깃발을 손에 들고 가슴에는 조선인 이름을 달고서 경기에 참가했으며, 만천하에 조선의 민족성을 과시했다."

a 홍창수 선수

홍창수 선수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으로 송금되는 금액이 줄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원이 줄고, 총련이 운영하는 학교에 등록하는 학생의 수가 줄어드는 등 총련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러한 홍 선수 끌어안기는 북한과 일본을 활동무대로 하는 북한지지세력 간의 결속을 공고히 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본 논의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일본 식민지 통치시대의 후반기와 일본의 조선인 강제 동화정책인 '내선일체'를 연결시키는 조선중앙통신의 다음 기사다. 일석이조를 노린 것이다. 첫째, 쇠퇴하는 총련 세력은 일본 내 친북 단체가 겪고 있는 심오한 변화를 대변한다. 재일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획득하고, 일본인과 결혼하고,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용어를 사용해 반식민주의를 주장하면서 일본사회에 동화하려는 시도를 기사는 지적한다. 다음으로 홍 선수의 성공을 동화정책에 대한 투쟁으로 묘사하면서 홍 선수의 승리가 조선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말살하려는 환경에서 얻어낸 값진 조선인민의 승리라며 치하한다.

한때 식민통치를 받던 국가가 승리를 하면 과거의 고통도 다소 누그러지고 고통스럽던 피통치 시기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투쟁정신과 끈기를 강조하는 역사 이야기로 녹아 들어간다. 한반도의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는 두 정부에게는 따라서 승리가 중요하다. 이는 또한 남북한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북한과 FIFA와의 갈등에서 한국이 북한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지 몇 달이 지난 2005년 8월, 적이자 형제인 남북한 축구대표팀은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서울에서 친선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에서 응원단은 각각 남한과 북한의 깃발이 아닌 한반도기에만 환호하도록 사전 안내를 받았다.

덧붙이는 글 | [1] 박성우 "축구의 역사: 숙적에서 월드컵 공동개최까지" 코리아타임즈(인터넷판 2003년 4월 14일자) 
 
[2] J.E. 호어, 수잔 페어스, <21세기 북한: 해설이 곁들여진 안내서> (켄트, 영국, 글로벌 오리엔탈 출판사, 2005; 134쪽)

[3] 조선중앙통신 인터넷판 2001년 6월 19일자

*가이 포달러는 히브리 대학 극동연구학과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한국의 기억과 유적지를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썼다. 이 글은 2006년 2월 9일에 <저팬포커스>에 게재된 글이다.

덧붙이는 글 [1] 박성우 "축구의 역사: 숙적에서 월드컵 공동개최까지" 코리아타임즈(인터넷판 2003년 4월 14일자) 
 
[2] J.E. 호어, 수잔 페어스, <21세기 북한: 해설이 곁들여진 안내서> (켄트, 영국, 글로벌 오리엔탈 출판사, 2005; 134쪽)

[3] 조선중앙통신 인터넷판 2001년 6월 19일자

*가이 포달러는 히브리 대학 극동연구학과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한국의 기억과 유적지를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썼다. 이 글은 2006년 2월 9일에 <저팬포커스>에 게재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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