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족보존을 위해 24시간 전투를?

스타크래프트에 갇힌 우주의 낙오자들

등록 2006.02.17 14:55수정 2006.02.2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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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게임 중독된 식당 주인, 손님도 몰라본다

회사원 A씨가 떡볶이 생각이 날 때마다 찾는 분식집. 작은 공간에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곳에는 컴퓨터가 놓인 테이블이 따로 있다. 사이버 분식집이냐고? 아니다. 그 앞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항상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다.


매번 분식집에 올 때마다 그 사람은 '한결' 같았다. 요지부동. 시선은 모니터에 꽂혀 있고 모든 신경은 오직 'GG(상대의 게임 포기 선언)'에만 있는 듯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바로 그 가게 사장이라는 것. 하지만 그 사장은 주문도, 계산도 안중에 없었다. 배달할 때도 휴대용 게임기를 항상 들고 다녔다.

말끔하니 손님을 반겨도 시원찮을 판에 게임에 완전 몰입한 사장이라니… 갈수록 다시는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이 생각은 A씨만은 아닌 듯했다. 가게를 찾는 손님이 눈에 띄게 빠지고 있는 것. 물론 그 사장님은 여전히 종족 결투의 전장에 서 있다.

# 2. 그의 세계관은 '스타크', 게임 언어로 소통한다

영화 일을 하는 B씨. 집에 들어오는 날도 얼마 되지 않지만 방 문턱을 넘자마자 그는 TV부터 켠다. 채널은 많아도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게임과 격투기뿐. 특히 게임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스타크래프트 최근 경기 결과와 선수들의 활약상은 물론 팬들의 반응이나 해설자의 말버릇, 게임 스튜디오 분위기까지 모두 꿰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게임 채널을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다.

가끔 차가 끊겨 집에 가지 못할 때는 PC방에서 밤을 새운다. 스타크래프트와 3D 온라인 길거리농구 게임인 '프리스타일'을 즐기면서.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반드시 도전할 정도로 새로움에 대한 긴장감도 늦추지 않고 있다. 하루종일 PC방에서 게임을 하기도 하고 잠깐 들른 PC방에서 밤을 새우고 곧장 출근하기도 한다.


그는 게임에 충실한 언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사람을 쳐다볼 때는 '옵서버(정찰용 캐릭터)로 본다', 누군가를 방해할 때는 '선컨(방어용 물체) 깔아라'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다쳐서 치료할 때는 '매딕(치료 캐릭터) 불러라', 물건을 옮길 때 '드랍십(캐릭터를 태우는 기구) 불러라'라고 외친다. 가끔 그를 볼 때면 게임 캐릭터와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a 수많은 사람들을 폐인으로 만들었던 게임 <스타크래프트>. 사실 기자가 홀렸던 게임은 스타크가 아니라 리니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폐인으로 만들었던 게임 <스타크래프트>. 사실 기자가 홀렸던 게임은 스타크가 아니라 리니지였다. ⓒ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

머릿속에는 실뱀 백만 마리가 꿈틀거리고 나의 칼에 쓰러져간 적들의 비명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게임을 시작한 지 3일째에 접어들었지만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에는 빨갛게 핏발이 섰고 입술에서는 파르르 경련이 느껴졌다.


나도 한때는 '게임 폐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내게 게임방은 집보다 더 친숙한 곳이었으며 가족보다 더 친근한 이가 게임방 사장님이었다. 온라인 게임에서 접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은 한순간 나의 생활을 뒤바꿔 버렸다.

결국 나는 게임을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고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하루종일 게임에만 몰두했다. 친구도 필요 없었고 가족도 귀찮았다. 잠자는 시간에도 게임 생각이 났다. 간혹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PC 앞에 앉으면 걱정들은 모두 사라졌다. 완벽한 '폐인', 그 시절의 나였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게임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흔치 않은 케이스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한국문화진흥원에 있는 인터넷중독예방센터(http://www.iapc.or.kr)가 문을 연 것은 지난 2002년 4월. 인터넷 이용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인터넷 중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나타날 때쯤이었다.

a 서울 화곡동에 위치한 한국 문화진흥원 내의 인터넷중독예방상담센터.

서울 화곡동에 위치한 한국 문화진흥원 내의 인터넷중독예방상담센터. ⓒ 박봄이

이곳에서는 인터넷 중독인 개인 혹은 가족을 대상으로 전문 상담을 하는데 상담원이 직접 초·중·고교를 방문해 파견 상담을 하기도 한다.

센터에서는 인터넷 사용자들을 고위험 사용자군, 잠재적 위험 사용자군, 일반 사용자군으로 나누며 잠재적 위험 사용자군 이상이면 심할 경우 치료까지도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선임상담원 김미화씨는 센터에서 직접적인 치료를 하지는 않지만 필요할 경우 병원에 의뢰하는 것까지 담당한다고 밝혔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대부분의 인터넷, 특히 게임 중독자들은 자신의 중독 상태나 그 심각성을 자각하기가 쉽지 않다. 당연히 그런 중독자들이 직접 상담센터를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실제로 이날 함께 센터를 찾기로 약속했던 28세의 윤모씨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PC 앞에서 게임에 빠져 사는 폐인이다. 잠자는 시간도 줄이고 약속도 미루며 게임에 몰두하는 일도 잦다.

그런 윤씨가 약속 날 아침 잠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김미화씨는 "가족들이 데리고 온다고 해도 본인 스스로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대답을 회피하거나 상담 자체를 거부하는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인터넷 폐인'과 '인터넷 게임 폐인'의 차이

a 테스트 결과 잠재적 위험사용자군이라고는 하나 현대인들에겐 무리는 아니라고.

테스트 결과 잠재적 위험사용자군이라고는 하나 현대인들에겐 무리는 아니라고. ⓒ 박봄이

결국 윤씨의 대타로 동행했던 한 시민기자가 테스트를 받기로 했다. 얼떨결에 테스트를 받게 된 그는 영 개운치 않다는 얼굴이다. 아마도 그동안 자신의 인터넷 사용도를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던 듯, 혹 결과가 심각해 치료받으라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표정이었다. 약 40문항의 항목별 체크 리스트를 작성하는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총점 106점으로 잠재적 위험 사용자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PC를 사용하는 대부분 사용자는 일반 사용자군으로 분류되는데 그 가운데 '몰입도가 높은' 단계인 잠재적 위험 사용자군도 많은 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인터넷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을 가져오는 고 위험 사용자군은 상담과 치료가 꼭 필요하다.

테스트를 받은 시민기자는 비록 잠재적 위험 사용군으로 분류됐지만 게임 중독이 아니라 정보 등을 얻기 위해 인터넷을 그 정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무리는 아니라고 김미화 상담원은 설명했다.

a 인터넷중독예방센터 선임상담원 김미화씨.

인터넷중독예방센터 선임상담원 김미화씨. ⓒ 박봄이

그렇다면 인터넷 중독과 게임 중독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반적으로 '웹서핑'이라고 하는 인터넷 중독은 특정 혹은 불특정 사이트를 오가며 인터넷 자체를 즐기는 것으로 그 수도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게임 중독은 그 수나 그 정도에서 심각하다. 게임 중독자들은 한 번 플레이를 시작하면 24시간 혹은 그 이상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는데 이곳 센터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러한 게임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다.

한 상담자의 경우 억압적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기질적으로 게임이나 놀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집에서 그것이 허용되지 않아 작정을 하고 가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기질과는 반대로 행동양식은 너무 조용하고 소심해서 PC방에서 하루 이틀 지나면서 직장에 전화를 할 용기도 없어지고 집으로 돌아갈 자신도 없어진 것. 결국 그는 두 달 동안 잠적하고 말았다. 이후 상담센터를 찾아 상담과 치료를 받고 정상을 되찾는 듯했지만 몇 년 후 또 다시 게임 때문에 잠적을 했다고 한다.

가상세계에서 낙오자가 되진 말아야

중독 현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번져나가고 있다. 인터넷과 게임으로 학업을 포기하는 청소년들 이야기가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며 직장과 가족, 그 모든 것들과 담을 쌓은 채 집안에만 칩거하는 '은둔형 외톨이'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히키코모리'족이 대표적인데 우리나라에도 잠재적인 히키코모리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게임 중독 현상이 사회 문제화되자 게임사들도 각종 캠페인을 벌이는 등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 플레이 시간을 숫자로 표시하거나 '멘트'로 안내해 주기도 하고 게임 중독을 우려하는 각종 캠페인 문구를 채팅창에 띄우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을 앞에 두고 통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있기는 한 걸까. 현재까지 나와 있는 치유책 중 한번에 똑 떨어지는 만족할만한 특효책은 없는 듯하다. 사실 게임중독으로 서서히 잠식되는 육체적 정신적 손실을 한번에 떼어낼 수 있는 방책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하다.

김미화씨는 가상세계보다 현실세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늘리는 것, 다른 취미를 갖는다거나 자신만의 게임 이용 기준을 세우는 것, 그리고 주변에서도 PC 앞에만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비판이나 강요하기보다는 함께 제어하기 위해 도와줘야 한다는 것 등을 인터넷 게임 중독에서 탈출할 수 있는 첫 단추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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