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15일 서울 남산초등학교에서 전 열사의 명예졸업장을 대신 받고 있다. 생전의 전태일 열사가 중퇴한 남대문초등학교는 현재 폐교돼 학적 관리를 하고 있는 남산초등학교에서 전 열사에게 명예졸업장을 대신 수여하게됐다.오마이뉴스 남소연
15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동2가 남산초등학교의 제61회 졸업식장.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아이들은 다소 흥분된 듯 강당이 울릴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그 속에 졸업장을 직접 받지 못하는 한 학생의 빈 자리가 보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전태일 열사(1948~1970)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마음 속에 있던 빈 자리다.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며 배움을 열망하던 전태일 열사가 민주화를 위해 몸바친 지 36년만에 초등학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전 열사는 지난 1960년 4·19가 일어나기 직전 3월께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전 열사가 '남대문'이 아닌 '남산'에서 명예졸업장을 받게된 것은 1979년 폐교된 남대문초등학교의 학적부를 남산초등학교가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사이버 분향소에 등록된 남대문초등학교 총동문회를 본 뒤 명예졸업장 수여를 제의했고, 서울시교육청과 남산초등학교가 힘을 더해 전 열사의 명예졸업장을 만들어 냈다.
이날 전 열사의 졸업식은 45년이나 어린 까마득한 후배들과 함께 치러졌다. 이소선 여사 외에 누이인 전순옥·전태리씨도 참석했다.
가난 때문에 학교는 포기했지만 책을 놓지 않았던 전태일
"부모가 못나서 초등학교 공부도 못시키고… 그동안 마음 편히 살지 못했다. 가난이 큰 죄라는 걸 깨닫는다."
전 열사의 명예졸업장을 대신 받아든 이소선 열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명예졸업장을 만드는데 애쓴 모든 사람들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잊지 않으면서도, 어려운 시절 자식 교육 제대로 못시켰다며 평생 한을 품고 사는 우리네 어머니 모습 그대로였다.
이 여사에 따르면, 1960년 당시 전 열사의 가족은 남대문에서 수영복, 학생복 등을 제작·납품하는 일을 하다 물품값을 받지 못하는 사기를 당해 거리로 나앉게 됐다. 그때 이 여사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신착란 증상을 일으켰다. 전 열사는 아픈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했던 건 아니다. 이 여사는 "태일이는 밥 먹을 때나 버스 안에서나 화장실을 가나 항상 책을 들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순옥, 태리 누이들도 "오빠는 항상 책을 읽었으며 그 내용을 우리에게 들려주곤 했다, 우리가 시험에서 하나씩 틀릴 때마다 자를 회초리 삼아 때리고 몸소 공부를 가르쳐줄 정도로 공부에 애착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우리집은 웬만한 학자 집안보다 더 엄격한 분위기였다"고 순옥씨는 고백했다.
그런 오빠 덕분인지 순옥씨는 봉제공장 노동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일해오다 36세 되던 1989년 영국 유학길에 올라 12년 동안 '1970년대 한국 여성 노동운동'에 대해 연구하게 된다. 2001년엔 워릭 대학에서 'They are not Machines'라는 논문으로 최우수상을 받고 노동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다. 논문은 일부 수정을 거쳐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2004)로 한국에 소개된 바 있다.
이 여사 "이웃을 사랑하세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15일 서울 남산초등학교에서 전 열사의 명예졸업장을 대신 받은 뒤 재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볼을 부비고 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졸업식에서 이 여사는 단상에 나와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이 여사는 "여러분은 좋은 부모를 만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큰 일꾼이 돼야 합니다"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이웃을 사랑하세요"라고 당부했다. 졸업식 뒤엔 손자뻘 되는 아이들이 요구에 사진촬영도 마쳤다.
한편 남대문초등학교 총동문회는 오는 18일 오후 전태일 거리에서 남대문초등학교 총동문회, 서울시교육청, 이소선 여사, 전태일기념사업회 등이 참여한 가운데 전태일 열사에게 '자랑스런 남대문인 감사패'도 수여할 예정이다.
정광섭(60) 남대문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은 "2000년 남대문초등학교 총동문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터넷 검색 중 전 열사가 우리 학교를 잠시 다녔다는 기록을 발견했다"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민주화에 기여한 그의 뜻을 청소년에게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고 명예졸업장 수여 추진의 계기를 밝혔다.
다음은 전태일 열사 명예졸업장 내용이다.
'명예 졸업장'(제1호)
1948년 8월 26일생 전 태 일
위 학생은 1960년 서울남대문초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중퇴하였으나 스물두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어려운 이웃들에게 큰 사랑을 실천하여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었으며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늘 배움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기에 폐교된 서울남대문초등학교를 대신하여 이 명예졸업장을 수여합니다.
2006년 2월 15일 서울남산초등학교장 황 명 자
| | 여동생들 "동생을 끔찍히 사랑하던 오빠" | | | |
| | | ⓒ오마이뉴스 남소연 | "한번은 오빠가 산수경시대회에서 1등 해 교장이 오빠를 업고 좋아하기도 했고, 조회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칭찬도 했다. (작은 오빠가) 숙제를 하지 않아 선생이 야단을 치면 '형이 태일인데요'라고 할 정도로 든든한 '빽'이기도 했다."
이날 남산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만난 전태일 열사의 누이들은 전 열사를 "공부 잘하고, 동생들을 끔찍히 사랑하는 오빠"로 기억했다.
순옥씨는 6년 어린 여동생. 하지만 전 열사가 학교에 띄엄띄엄 나간 탓에 전 열사가 4학년일 때 1학년이었다. 태리씨는 12년 터울의 막내동생. 전 열사 바로 아래엔 남동생 태삼씨도 있다.
순옥씨는 오빠에 대한 추억이 유난히 많다. 그는 "어머니가 편찮으시자 오빠가 막내 동생(태리)을 업고 학교에 다녔다, 주말이면 도시락 싸서 동생들 데리고 유원지로 놀러다녔다"고 과거를 떠올렸다.
덕분에 "당시 한강, 뚝섬, 강나루 유원지 등 서울 시내서 안가본 유원지가 없다"고 했다. 뚝섬에서 소라를 잡아 주전자에 끓여먹던 추억도 생생하다.
순옥씨는 "한번은 오빠 친구들이 '동생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오빠가 '그럼 동생들과 놀께' 하더라, 그만큼 우리를 아껴주었다"고 회상했다.
태리(순덕에서 개명)씨는 전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죽어간 1970년 10살 박이 꼬마였다. 그의 기억에는 전 열사가 아침에 출근하던 모습과 밤에 공부하던 모습만 남아 있다. 오빠이면서 아버지였던 전 열사의 죽음을 접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는 털어놨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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