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눈감은 벌목, 국민이 대가 치른다

필리핀 레이테섬의 비극... 정부가 애도성명으로 그친다면

등록 2006.02.21 08:29수정 2006.02.2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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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필리핀 산사태 후 구조대가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필리핀 산사태 후 구조대가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필리핀 중부의 레이테섬에는 수년째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특히 라니냐의 영향권에 들 때마다 필리핀 대부분이 꼼짝없이 폭우로 피해와 한파를 겪는다.

레이테섬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으로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켜 상륙작전을 벌인 곳이다. 미 태평양함대가 일본 해군을 사실상 패배시킨 레이테섬은 역사상 최대의 해상격전지가 되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혼령은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여전히 불운의 섬을 떠나지 못하고 죽음과 파괴를 몰고 되돌아오는 듯 하다. 바사야족이 거주하는 레이테섬에 닥친 비극은 무능한 정부에다 대통령이 나서도 통제하기 불가능한 마구잡이식 불법 벌목이 그 원인이다.

몇년째 계속된 홍수와 산사태... 섬을 떠나지 않는 죽음의 그늘

레이테섬은 벌써 몇 년째 반복되는 라니냐의 습격과 이어지는 한파로 고통을 겪고 있다. 정치적 격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정부와 필리핀 국민들이 뒤늦게라도 교훈을 얻고 산속에서 자행되는 무자비한 벌목을 중단시킬 방안을 강구했다면 좋으련만 달라진 것은 없다.

1991년에 쉬지 않고 퍼부은 폭우로 레이테섬 서부에 홍수가 발생해 8천여명의 섬주민이 사망한 오목 대재난은 필리핀인들에게 잊지 못할 교훈을 준 최초의 사건이다.

2003년 12월에는 레이테섬 남부에 위치한 릴로안 마을에서 산사태로 해안가 세 마을이 매몰되어 83명이 생매장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자연재해로 수십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의 이재민이 속출했다.


호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과도한 벌목으로 벌거벗은 산이 급류를 이겨내지 못해 급기야 생명을 위협하는 산사태가 발생한다. 규제를 받지 않은 채 벌목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면 토양이 빗물을 흡수할 수 있는 양이 줄어드는 게 당연하다. 숲이 무성하고 정부 부패나 정부 태만이란 말을 들어볼 수 없던 예전에는 필리핀 국민들의 사전에 홍수라든지 산사태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산림파괴가 계속되면 더 큰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고 일부 정부관료와 생태학자들이 그 동안 여러 차례 경고했다. 1991년 레이테 주지사는 오목 대재난의 주범이 불법 벌목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아키노 피멘틀 상원의원은 국가지도자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분개해 필리핀의 남은 삼림을 파괴하는 벌목자들에 대항해 "국민의 힘"을 보여줄 것을 주장했다.


오목과 릴로안의 대재난은 며칠 간 신문의 1면을 장식했지만 초기의 야단법석은 곧 사그라들고 무관심한 사람들과 정부는 두 번의 재난을 곧 잊었다. 다시 산림파괴가 신문지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세인트버나드 마을을 통째로 삼키며 300명 이상의 사망자와 2천여명의 실종자를 낸 산사태 때문이다.

늘 그렇듯 애도성명... 불법 벌목 뿌리뽑지 않는다면

이 기사를 쓰는 순간에도 거대한 산 하나를 평지로 만들며 초등학교를 덮친 산사태로 200여명의 어린이와 교사들이 끔찍한 진흙 무덤에 묻혀있다. 어린 희생자들은 자신들을 덮친 것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지만 아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이득을 취한 이들은 명백히 무고한 사람의 피를 마시고 있는 셈이다.

아로요 정부는 늘 그랬듯 산사태에 대한 유감과 사망자에 대한 애도성명을 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가 무고한 산림과 인명을 해치는 불법 벌목을 확실히 뿌리뽑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필리핀 국민 모두가 정부가 후원한 살인적인 산사태에 파묻힐지 모른다.(*번역: 정혜진)

필리핀 주요 자연재해 일지

2005년 12월 마닐라 남부 5개 도시에서 호우로 5명 사망
2005년 2월 동·남부에서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와 홍수로 13명 사망
2004년 12월 동부에서 집중호우 이후 산사태와 홍수로 1500여명 사망
2003년 12월 동부에서 산사태로 최소 160여명 사망
2003년 9월 남부에서 호우로 진흙사태가 발생 광부 등 23명 사망
2001년 11월 중부지역서 열대성 폭풍우로 171명 사망, 118명 실종
2001년 7월 북부 바구이오에서 태풍 '유토르'로 121명 사망
1996년 7월 중부지방에서 태풍 '글로리아'로 20명 사망, 6명 실종
1995년 11월 강력한 태풍으로 500명 사망, 이재민 50만 명 발생
1995년 9월 남부에서 대형 산사태로 홍수 발생, 15명 사망
1995년 1월 중부에서 진흙사태와 홍수로 20명 사망, 45명 실종
1991년 11월 레이테섬에서 홍수와 산사태로 6000여명 사망.
1991년 6월 피나투보 화산 폭발 800명 사망
/ AP

덧붙이는 글 | *알렉스 아르곳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의 시민기자다. 필리핀 일리간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으며 레이테섬의 산사태 이후 여러 편의 기사를 송고해 왔다.

덧붙이는 글 *알렉스 아르곳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의 시민기자다. 필리핀 일리간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으며 레이테섬의 산사태 이후 여러 편의 기사를 송고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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