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내선일체식 폭군에 끌려가는 대한민국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02>를 읽고서

등록 2006.02.25 14:39수정 2006.02.27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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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 한겨례출판

"나는〈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화려한 영화를 재미있기 봐도 과연 그 전투 장면을 어렵게 연출해 낸 수많은 엑스트라가 일당으로 얼마나 받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떨쳐낼 수 없다. 상품이 아무리 좋아도 그 상품을 만든 이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않았다면 '노예 노동의 결실을 즐기고 있다'는 가책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박노자가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 02>(한겨레출판·2006)에 나오는 머리말 가운데 한 대목이다. 귀화한 한국인으로 우리 사회를 꿰뚫어 보고 있는 그의 통찰력에는 우리나라를 향한 진정 어린 안타까움이 베어 있다. 그만큼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제동을 걸면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이정표를 제시해 준다.


사실 우리나라는 과학계든 영화계든 전자제품이든 간에 세계화 대열 속에서 수많은 공적을 쌓고 있다. 그 업적도 세계인의 눈을 주목게 하고 열광케 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것을 일궈내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낮은 임금 속에 신음하고 있다.

바깥에서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대우를 감수하면서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죽도록 일하게 하는 노동 시장의 공포 속에서 일궈낸 것들이다. 전자제품이나 과학기술이 천하를 평정한 듯 보이지만 수백만에 달하는 영세민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제 살들을 깎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외국인들은 모르고 있다.

대기업제품들의 멋진 모양과 저렴한 가격에 놀라는 외국 구매자들은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하청 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과 대우가 어떤지 도무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제품만 좋고 모양만 번지르르하면 됐지 그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내 노동자들은 안중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황우석 현상을 흠모의 눈으로 바라봤던 외국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박사급 연구자가 70만 원 정도의 월급으로 하루 12-13시간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의 '바깥'과 '안'은 그만큼 차이가 크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만 느끼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를 흠모하고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온 러시아 여성들이 할 일이 제한돼 있고, 때로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고통 속에 있으니 그들이 느끼는 '바깥과 안의 차이'는 그저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우리를 일약 축구강국으로 만들어 준 히딩크가 자랑스럽다며 그에게 '명예국민증'을 준 우리 사회가 세계 시장에 내 놓을 우리나라 제품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은 채 '노동허가서'까지 거부하고 있다. 이 현실을 보면서, 과연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과 대우에 비해 외국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과 대우는 그만큼 차이와 차별이 심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만큼 바깥에서 보는 한국과 안에서 보는 한국은 다르다. 이런 노동 시장의 환경을 드러내 놓고 있는 우리나라를 어찌 선진대열 속에 있는 '대한민국'이라 자랑할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 자본주의를 넘어선 신자유주의 열풍이 빚어낸 모순 덩이다. 이른바 성공신화를 부추기는 열풍 속에서 무능력한 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 그런 엉터리 같은 억압과 살생의 구조 속에서 어떤 인간성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저 로봇과 같은 능력형 인간과 쓸모없는 사람 같은 잉여인간이라는 두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 양극화가 우리 사회에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되고 있으니 이 물결을 누가 막으려 들겠는가.


그런 것들을 막으려 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영자(英字)의 전성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초등학교와 유치원만 보더라도 알 수 있고, 오로지 기득권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 또 이미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어린 자녀를 막무가내로 해외로 유학(幼學) 보내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부모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거기에다 군사정권 시절부터 국가와 밀접하게 유착하여 그 논리를 체화한 제도권 종교, 이른바 개신교 내 보수주의 세력화 집단들이 추구하는 '광적인 숭미(崇美)주의' 현상도 빼놓을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오로지 미국식 선교와 미국식 정치, 미국식 경제 논리에 복종하고 답습하는 길만이 한국을 세우고 보존하는 길이요, 그 까닭에 미국이 주도하는 모든 것에 그대로 끌려가는 것만이 우리가 영구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식의 논리를 편다.

그만큼 미국 것은 다 아름다운 것이요, 미국 것은 다 최고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그 까닭에 말도, 언어도, 학문도, 정치도, 경제도, 사회 문화도 모두 숭미사상에 흠뻑 젖어들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이 기득권을 놓지 않고 후대까지 계속 꽤 차고 누릴 수 있는 길임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것이라 그럴까….

"현 단계에서 다수 근로자의 언어가 지식 사회에서 시민권을 잃어 가는 것과 패권 제국의 언어가 사회 귀족 특권의 상징으로 부상하는 것은 사회의 대다수 피지배 구성원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이는 결코 '선진화'가 아니며, 사회 양극화의 언어적 표현이자 동아시아 시대에 역류하는 대미 예속의 강화일 뿐이다."(63쪽)

"아이들에게 혀 수술을 강요할 정도로 영어 교육에 열을 올리고 미국 이민을 꿈꾸는 강남의 신세대들은, 탈(脫)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신자유주의적 종속성이 심해지는 나라에서, 그들은 식민 모국의 최강의 민족주의에 홀려 새로운 방식의 내선일체를 실천할 뿐이다."(225쪽)


그렇듯 박노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 덩이가 무엇인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부추기는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국만을 숭배하거나 굴종하지 않고 오로지 제 길을 굳건하게 세워 갈 수 있는 길도 이 책 뒷부분에서 제시해 주고 있다.

박노자는 전쟁이든 곡물이든 공산품이든 간에 세계 모든 국가를 자국의 종속국으로 내선일체 하려는 미국식 폭군 운동에 반대하는 세계적인 정신적 평화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박노자는 우리나라에서 자국민이든지 외국 근로자든지 간에 모든 노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제 힘 찾기와 제 기를 펼 수 있는 지지와 연대를 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만이 '본래 인간성의 결핍'을 가져오고 또 확대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 물결을 종식할 수 있으며, 그것만이 노동현장의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그 속에 일어나는 부와 가난의 양극화라는 수레바퀴를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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