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이다

정호승, 안도현, 장석남, 하응백이 쓴 <사랑은 다 그렇다>를 읽고

등록 2006.02.27 19:31수정 2006.02.2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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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시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틀이 있고 간격이 있고 짜임새가 있고 또 숨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읽어도 읽어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시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사람들이 많은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서도 시가 어렵고 멀게만 느껴진다. 어렸을 적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더더욱 가까이 하기에는 먼 당신이었다. 수업시간이나 시험 때문에라도 시를 끼고 살아야 했지만 그게 모두 성적 때문에 한 일들이었지 진심에서 우러난 일은 아니었다. 외우고 곱씹어서 머리 속에 집어넣던 일들이 그땐 다 그랬다.


그 때문에 지금껏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뭔가 유별난 사람들만 하는 일인 줄 안다. 시가 아니면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발언도 하지 않는 사람들…. 시를 써서 시대를 맑고 깨끗하게 해 주는 사람들…. 시를 낭독하며 세상을 또렷하고 밝게 이끌고 가려는 사람들….

그러나 시는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게 해 주는 책이 있다. 누구나가 쉽게 시에 다가가고, 누구나가 시를 쓸 수 있고, 누구나가 시에 쉬이 사로잡힐 수 있음을 알려 주는 책이다. 그저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듯, 그런 느낌과 감정으로 시를 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정호승·안도현·장석남·하응백이 쓴 <사랑은 다 그렇다<(해토, 2006)가 그것이다.

"시를 사랑하는 계기는 다양하다. 시를 완전히 이해해야 시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우연한 계기로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불꽃처럼 사랑하듯, 시도 그처럼 우연히 다가올 때도 있다. 굉음을 내며 다가올 때도 있고,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다가올 때도 있다. 둔중한 아픔으로 올 때도 있고, 스치는 바람처럼 가볍게 올 때도 있다."(책머리에)


이들이 밝힌 것은 시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머리를 쥐어짜서가 아니라, 외우고 또 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고 또 파서가 아니라 그저 밀물처럼 자연스럽게 밀려든 것이다. 그저 시가 좋고, 시를 흉내 내다 습작기에 접어들고, 그러다가 인생 자체가 시가 되고 시인이 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들이 읽어주는 시 세계는 그리 어렵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공감할 만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박이도가 쓴 <폭설>을 읽고 있는 하응백은 어린 시절에 보면서 자란 시골 마을의 폭설을 떠올린다. 온 천지가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국(雪國)이 그것이다.

그 시절 하응백은 꼭두새벽이 되어 장성 역에 도착하는데, 때마침 온 세상은 설백(雪白)으로 덮여 있고, 교통은 끊긴 지 오래지만 끝도 없이 펼쳐진 눈밭이 그의 온 맘을 새 하얗고 좋게 만들어 주었다. 그 때문에 그가 박이도의 <폭설>을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새록새록 어린 시절의 향수가 더욱 짙게 베어 나오는 법일 것이다.


미사일 같은 그스통도 빽빽하게 싣고 달리고
자본가들의 파티에 아첨꽃으로 바치는 화분 화한도 싣고 달리고
쿠션 좋아 하룻밤에 천국 열두 번 왔다갔다 한다는 외제 침대도
싣고 달리고
철거당한 민중미술도 전봉준처럼 싣고 달리고
별동네 달동네 겨울나기 연탄들을 시커멓게 웃기며 싣고 달리고
변두리 변두리로 쫓겨가는 일가족의 비 맞은 이불보따리도 싣고 달리고
죄 없이 죽어 거적때기에 둘둘 말린 시퍼런 주검도 쌩쌩 싣고 달리고


이는 정호승 시인이 읽고 있는 박해석의 <타이탄 트럭>이다. 정호승은 이 시를 왜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박해석의 시를 읽으면 어쩔 수 없이 가난하던 청년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도 그렇고 박해석 시인도 그렇고 그리고 그 시절 가난했던 모든 시인들은 밥을 굶기가 일쑤였고, 유부국수나 우동 한 그릇으로 온 하루를 지냈던 적이 많았다.


그 때문에 어떤 날에는 날계란 하나를 풀어주는 모닝커피로 아침을 때우고, 그것을 계기로 하루 종일 다방의 한쪽 구석진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시를 쓴 적도 많다. 다방 종업원이 눈치를 주거나 주인이 핀잔을 줘도 사정을 봐 달라며, 그저 쓴웃음을 짓고서 눌러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형편이니 이사는 또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 그와 박해석은 같은 대학교 국문과 문예장학생었지만, 그보다는 박해석이 더 없이 많이 굶었고, 잠잘 곳도 없어서 한때는 대학교 강의실 시멘트 바닥에서 자기도 했다고 한다. 그에게 그 시절의 가난은 눈물과 한이요, 그리고 시는 그로 하여금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그렇기에 정호승 시인이 박해석의 <타이탄 트럭>을 읽을 때면 얼마나 눈시울이 붉어질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박해석 시인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집을 옮겨 다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들은 그 당시 가난을 눈물로 벗 삼고 참으며, 가난을 힘으로 삼고 이겨냈던 모든 동시대인들, 그리고 오늘날 그런 형편에 처한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는 현실이지 않나 싶다.

그리고 하나 더 읽어보면, 안도현 시인이 읽어 주는 서정주의 <내 늙은 아내>가 참 재미있고 진솔하다. 안도현은 그 시를 읽으면서 그저 혼자 읽지 않고, 자기 아내에게 들려주듯, 서로 웃으며 읽었다고 한다. 그만큼 시를 통해 못 다한 사랑을 속삭였던 것이다.

그런데 평소에는 담배 재떨이가 그대로인데, 그 시를 읽어주는 동안, 아내는 자신의 담배 재떨이를 말끔히 비워줬다고 한다. 그러자 안도현은 자신의 아내에게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는 시를 그대로 전했고, 그의 아내는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하며 소리쳐 웃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솔직담백한 이야기들인가.

시는 그렇듯 쓰는 이에 따라, 읽는 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결코 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요, 이 세상에서 겪은 일들을 쓴 이야기이다. 그것을 줄여 쓴 것이요, 그것에 음률을 붙인 것이요, 그것에 한과 고통과 울부짖음과 눈물을 담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에 생기를 불어 넣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나누는 데에는 어린 아이라도, 나이 많은 노인이라도 거치지 않고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리라. 시는 그만큼 자신의 삶 속에 자연스레 다가오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사랑이요,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다 그렇다 - 시가 있는 에세이

정호승.안도현.장석남.하응백 지음,
해토,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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