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일본군 집단위안소를 찾다

[중국 현지] 1930년대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위안부실태 빨리 규명해야

등록 2006.02.28 21:52수정 2006.03.2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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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동빠오로의 위안부집단숙소는 현재 가난한 중국 서민들의 연립주택이 되어 있다

동빠오로의 위안부집단숙소는 현재 가난한 중국 서민들의 연립주택이 되어 있다 ⓒ 유창하

지난해 중국의 한 역사학자가 상하이(上海)에서 과거 일본군을 위한 종군위안소가 대규모로 운영됐다는 내용을 공개해 한국 일부 언론사들이 방문 취재하여 보도한 적이 있다.

상하이 사범대학 교수인 쓰즈량(蘇智良) 교수(역사학과. 중국위안부연구센터 주임)는 상하이 시내 곳곳에서 역사자료와 주민 고증을 통해 149곳의 위안소 건물 등을 찾아냈다. 그중 상당수는 한반도에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였다는 사실도 공개하고 <상해일본군위안소실록>(上海日本軍慰安所實錄)이라는 책을 펴내 자세히 소개했다.

이때 쓰즈량 교수가 언론에 공개한 집단위안소가 몇 군데 있다. 그 중 종군위안부로 상하이에 끌려온 조선인 처녀가 기거했던 집단위안소 중 가장 먼저 생기고 규모가 컸던 홍커우(虹口) 동빠우싱루(東寶興路)에 위치한 일본인 경영의 이른바 장교용 '대일살롱(大日살롱)'을 찾아가 보았다.

a 상하이의 홍커우에 있는 위안부 집단 숙소를 찾았다

상하이의 홍커우에 있는 위안부 집단 숙소를 찾았다 ⓒ 유창하

일본인의 상하이 조차지였던 동빠우싱루 주택가의 한곳에 있는 허름한 연립주택 형식의 일본인장교 위안소. 이곳은 현재도 옛날 그 모습 그대로다. 다만, 사는 주인만 바뀐 채로 그 자리에 있다. 주변의 빌딩 속에 파묻혀 금방이라도 헐려 번쩍이는 빌딩으로 변할지 모를 상황이지만 지금까지는 1930년대 모습 그대로이다.

일본군 집단위안소 구경삼아 찾는 일본인들

a 2층 복도는 일본식 나무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로 '쪽방'이 연결되어 있다

2층 복도는 일본식 나무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로 '쪽방'이 연결되어 있다 ⓒ 유창하

"과거 일본군의 집단위안소를 구경삼아 찾아오는 일본인들이 너무 많아 귀찮다"고 말하며 대뜸 "일본인이냐?"고 물어보며 문 열어주기를 꺼리는 이곳 거주 주민들과 20여 분이나 '대치하고서야' 겨우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초라하게 사는 자신들의 구차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어함은 당연하다. 간신히 대문을 들어서자 현관 앞에 낮은 계단 장식이 있어 과거 제법 고급저택이었음을 가늠하게 한다. 1층 홀은 가벼운 연회를 열 수 있을 정도 공간은 되어 보인다.


2층으로 올라가니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두운 좁은 복도 좌우로 '쪽방'들이 있어 '당시 위안부들이 기거했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복도에는 얼마 전까지 일본식 '다다미' 가 깔려 있었으나 최근에 너무 낡아 치워버렸다"고 한다. '다다미'를 치운 자리에는 나무로 엮어 만든 일본식 목재복도가 드러나고 창문과 천정을 살펴보니 전체적인 양식이 전형적인 일본식 주택구조를 하고 있다.


a 주민이 가리키는 창틀의 쇠창살은 '도주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말한다

주민이 가리키는 창틀의 쇠창살은 '도주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말한다 ⓒ 유창하

40여 년 전부터 거주했다는 한 중국 주민이 건너편 창문의 쇠창살을 가리키며 "위안부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할 용도로 만들었다"고 하기에 바라보니 쇠창살 창문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저 벽의 무늬도 일본인이 사용하던 쇠창살 문양"이라고 말하는, 일부가 파손된 담장 장식문양에는 일본식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어 1930년 당시로서는 화려했을 '대일살롱'의 모습이 떠오른다.

또다른 주민들 말에 의하면 "이곳에는 일본여성뿐 아니라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사기꾼들에 속아' 상하이로 넘어온 한반도 출신 한국여성들이 많았으며, 집단 위안소에 감금된 채 일본군 장교들의 성적 노리개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한국 여성들, 어떻게 중국까지 끌려왔을까

a 담장의 장식물 초록색 직사각형 문양은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문양이다.

담장의 장식물 초록색 직사각형 문양은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문양이다. ⓒ 유창하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 한국으로 귀국해 살고 있는 할머니들의 잇따르는 사망 소식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안타까운 집회 소식이 있다. 또 중국 헤이롱성과 안훼이성에서 북한 국적과 중국 국적으로 신분을 숨기며 60여년을 살아온 한반도 위안부 할머니의 소식이 알려지기도 한다.

일본군에 끌려온 종군 위안부 숫자가 20만명을 헤아린다고 말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더 많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중 한국인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일본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정확한 숫자를 확인할 길이 없다.

아직도 일본군이 전쟁을 벌이던 만주 지역, 중국 내륙, 상하이 인근으로 끌려온 많은 한반도 처녀들은 해방을 맞이했으나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중국인과 결혼하여 중국인처럼 살거나 아니면 부끄러워 신분을 숨긴 채 중국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

a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국 노인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국 노인 ⓒ 유창하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던 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일본의 공식 의견을 담은 <강제종군위안부 문제 2차 진상조사>를 발표한 적이 있다. 공식 발표문을 유추하여 중국 내 한반도 위안부의 모집상황과 숫자, 수송, 위안부 관리를 대강 가늠해 볼 수밖에 없다.

1932년 소위 상해사변 발발 시 그 지역의 주둔부대를 위해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자료가 있으며, 위안부의 출신지로서 확인된 국가 또는 지역은 일본, 한반도,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다. 전지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로서는 일본인을 제외하면 한반도 출신자가 많다. 위안소의 다수는 민간업자가 경영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위안소를 경영한 사례도 있었다.

민간업자가 경영한 경우도 구 일본군이 그 개설을 허가하거나, 위안소 시설을 정비하거나 위안소의 이용시간, 이용요금, 이용시 주의사항을 정한 위안소 규정을 작성하는 등 구 일본군은 위안소 설치와 관리에 직접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에 관해서는 군 당국의 요청을 받은 경영자의 의뢰로 알선업자들이 한 것이 많으나, 그 경우도 전쟁의 확대와 함께 그 인원확보의 필요성이 높아져, 그러한 상황에서 업자들이 감언이설을 말하거나 또는 공포감을 주는 등의 형태로 본인들의 의향에 반하여 모집한 사례가 많고, 더욱이 관헌이 직접 이에 가담하는 사례도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 한반도 처녀들이 '일본에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일본인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일본공장 위안부로, 전장 위안부로 넘겨졌다고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 죽기 전에 보상 받아야

a 2층으로 올라가는 목재 계단이 보이고 열지어 있는 '두꺼집'이 현재도 '쪽방'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목재 계단이 보이고 열지어 있는 '두꺼집'이 현재도 '쪽방'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유창하

'대일살롱'의 인근지역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60대의 한아무개씨는 1930년대 상하이로 돈을 벌기 위해 건너온 한국 교민 1세대의 2세. 상하이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북한국적을 지니고 있다가 한중수교 이후 한국국적으로 변경했다.

한씨는 "'홍커우 인근에는 전라도, 경상도에서 팔려온 조선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으며 '대기자가 많을 때는 바지 입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오래 거주한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상하이 위안소 중에는 재중 조선인이 경영하는 위안소도 있었다'고 한다. 중국으로 무작정 건너온 조선인 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 제 나라 처녀들을 일본군 성 노리개로 삼아 돈을 버는 악랄함을 보였다 한다.

한씨는 "당시 중국으로 건너온 조선인 중에는 독립 운동하는 사람이나 장사해서 돈버는 상인들만 아니라 건달도 많았고 화류계로 빠진 여성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당시 홍커우 지역은 전쟁 상황과 근대 격변기로 마약과 매춘이 조계지역을 넘나드는 암흑가와 비슷한 곳이었다는 것.

그는 "내가 알기로는 당시 상하이에 거주하던 위안소의 여성들 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생존 나이가 지나가고 있다"며 "빨리 일본군 위안부의 실태가 제대로 밝혀지고 그분들이 죽기 전에 그에 맞게 보상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중국 내 거주하는 위안부 할머니 6명이 국적을 회복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아직도 부끄러워 말을 못하고 있거나 한국 말을 잊어버려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할머니들을 중국 재외공관이나 교민단체, 민간단체에서 신경을 더 써서 찾고 도와야 한다.

민족의 수난기를 맞아 본인의 뜻에 반하여 굴곡의 삶을 보낸, 그로 인해 가족에게조차 말 못할 아픈 과거를 지닌 채 생을 마감할 나이에 접어든 위안부 할머니들이 편히 눈감을 수 있도록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유창하 기자는 다음카페 "중국 상하이 한인 모임" http://cafe.daum.net/shanghaivillage 운영자이다. 중국 상하이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유창하 기자는 다음카페 "중국 상하이 한인 모임" http://cafe.daum.net/shanghaivillage 운영자이다. 중국 상하이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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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간 오마이뉴스에서 쉬었네요. 힘겨운 혼돈 세상,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일상을 새로운 기사로 독자들께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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