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약볕 아래 동강 따라 걷다가 우연히 그 학교를 만났다. 그곳에는 예전처럼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이름모를 들꽃들과 해바라기는 한껏 고개를 늘이고 있었다. 화재 예방을 위하는지 시커먼 나무벽으로 도배된 그 추억 속의 일제 학교, 반쯤이나 올리다 만 태극기. 시골학교의 한가함이 절절히 묻어났다. 우리는 그 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한참을 쉬다가 갔다.윤재훈
냇가의 민들레도 노랑저고리
첫 돌맞이 우리 아기도 노랑 저고리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 보아라.
아가야 아장아장 걸어 보아라.
이제는 우리의 기억 속으로 아득하게 사라져 가는 동요, 고무신 깔닥깔닥 땀 젖은 소리를 내며 산모롱이를 돌아가고, 언덕 하나 넘어가면 보이던 아득했던 시절의 그 분교, 아카시아 꽃 흔들고, 삐비꽃 뽑아 먹으며 해찰 부리다 보면, 어머니 젖가슴처럼 수줍게 숨어 있던 그 시커맸던 목조건물.
작년 이맘때쯤 외동딸이 유치원에 갔다. 비록 교문 앞 당산나무처럼 거대하게 버티고 섰던 느티나무는 없지만, 딸의 손을 잡고 분교병설유치원을 찾았다. 총 학생이라야 여학생 3명, 남학생 4명, 초등학생 31명. 변변한 놀이기구 하나 없지만, 화양면 꽃다리 용문산 품에 안긴 그 곳, 산책길이 좋다고 자랑하시고 차 조심할 걱정도 없다던 처녀 선생님 말씀.
교실에 들어가니 세면대 안에는 병아리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샛노란 컵 5개, 벽에는 칫솔꽂이 몇 개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방실방실 웃고 있다. 생전 처음 부모의 손을 떠나 애들 틈에 끼어있는 아이, 이 세상에서 처음 맞은 학교 친구들, 평생 그 애의 가슴 속에 사표(師表)로 남을 첫 선생님의 온화한 모습, 의미도 모르고 눈망울 굴리며 듣고 있는 교장선생님의 훈시.
애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지, 천진한 표정들만 짓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그만 엄마 품을 떠나면 앙앙 울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의젓하다.
창문 밖으로는 꽃망울이 터질 듯이 맺혀있는 매화나무, 이것들이 피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 하늘을 다 덮으리라. 벌써 애들은 친해졌는지, 놀이기구 안에서 저희들끼리 노느라 한창이다. 낯을 가리지도 않고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역시 애들은 만나면 금방 친해진다. 아마 바랄 것도 없고, 속일 것도 없어서 그런가보다. 인간의 본 마음은 저러한 것인데, 처음에는 아주 맑고 작게 시작하는 저 섬진강의 수원(水原)인 데미샘처럼 착한 것인데, 살아오면서 들이게 되는 먹물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른들은 살아 갈수록 낯을 가린다. 사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들 어린 시절에 논둑길 걸으며 민들레꽃을 보거나, 도시의 한 쪽 귀퉁이 공터에서 뒹굴며 자라났을 텐데.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고, 무엇이 그리도 많이 걸리는지, 우리들의 표정은 나날이 굳어만 간다.
무엇이 한 번뿐인 우리들의 삶을, 이렇게 고단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노오란 민들레처럼 있는 데로만 보여주고, 가진 것만 말하며 살아가면 될 텐데, 아른아른 논바닥을 따라 올라오는 어린 시절의 그 아지랑이 속으로, 이 봄날 함께 뛰어봤으면, 그리고 우리들이 무엇을 잊어 가고 있는지, 이 봄날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입학식 철이 다가오고 노란 아이들이 종알종알 떠들면 학교로 가는 풍경을 보니, 문득 작년에 유치원에 들어간 딸의 입학식이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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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여 세계오지 배낭여행을 했으며, 한강 1,300리 도보여행, 섬진강 530리 도보여행 및 한탄강과 폐사지 등을 걸었습니다. 이후 80일 동안 5,830리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였습니다.
전주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를 쓰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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