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 이 형은 도서관 마니아잖아"

운동부 아이들이 책에 빠졌습니다

등록 2006.03.05 10:24수정 2006.03.0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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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른 아침에 강화중학교에 간 적이 있다. 아직 어둠살이 다 물러나지도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너른 주차장엔 차가 한 대도 없었고 학교는 조용했다.


본관건물을 끼고 별관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보니 운동장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운동부 학생들이 그 추위 속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춥다고 잔뜩 옷을 껴입은 나와는 다르게 트레이닝복을 입고 김을 내뿜으며 운동하는 그 애들을 보니 문득 겨울 추위 속에 파랗게 나있을 보리 싹이 생각났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에 새파랗게 논밭을 물들이던 보리 새싹들, 겨울은 내일을 준비하는 자에게는 보충의 계절이기도 하다.

예전에 나는 운동 경기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쳤던 2002년 월드컵도 그리 즐겨보지 않았을 정도로 운동 경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의 경기를 위해서 매일 자신을 담금질하고 단련하는 운동부 아이들을 보면서 운동경기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봄을 지나 막 여름으로 들어설 무렵인 지난 6월 초쯤, 쉬는 시간에 누가 도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복이 아닌 운동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누구니?"
"예, 저 여기 처음인데요. 뭐 좀 읽을만한 책 없을까요?"


그렇게 윤석이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어떤 책을 보고 싶어?"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뭐 편하게 볼 수 있는 책 없을까요?"


윤석이는 축구부원이었다. 방과 후면 항상 볼 수 있는 모습, 운동장에서 훈련하던 축구부원 중에 윤석이도 있었던 거였다.

"윤석아, 긴 글 읽기는 좀 부담스럽지? 그러면 이 삼국지 만화 어때? 모름지기 사나이라면 삼국지를 일곱 번은 읽어야 된다잖아. 글이 아니고 만화야. 그러니까 편하게 볼 수 있을 거야."

윤석이는 반산반의하면서 64권으로 이루어진 만화 삼국지의 1,2권을 가져갔다.

지난해 12월 9일 찍어 두었던 도서실 사진
지난해 12월 9일 찍어 두었던 도서실 사진이승숙
두 시간 쯤 지났나. 윤석이가 다시 도서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선생님, 이거 참 재미있어요. 더 빌려갈 수 있죠?"

그렇게 삼국지에 빠진 윤석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도서실을 들락거렸고 한 번에 빌려갈 수 있는 양인 두 권만으로는 양에 차지가 않는지 4권까지 빌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책에 빠진 윤석이는 어느 날 후배들을 데리고 도서실에 올라왔다. 짧게 깎은 동글동글한 머리에 하나같이 몸이 길쭉하고 팔다리가 길었다.

"형, 어떤 게 재밌어요? 형이 좀 골라줘 보세요."
"응, 이게 재밌어. 이거 봐."
"형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임마, 이 형은 도서관 마니아잖아."

책을 고르면서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모르는 척 내 일을 하면서 입가로 슬며시 웃음을 배어 물었다. 동생들에게 의젓하게 형 노릇하는 윤석이가 대견했고 책과는 거리가 멀 거 같은 운동부 애들이 책을 찾는 그 모습이 귀여웠다.

삼국지를 마지막까지 아주 맛있게 다 본 윤석이는 한동안 더 도서실을 드나들었다.
어느 날 윤석이가 책을 반납하면서 그러는 거였다.

"선생님, 저 당분간 도서실 못 와요."
"왜?"
"대회가 있어서 훈련을 해야 되거든요."
"응, 그래 윤석아. 그럼 훈련 열심히 하고 나중에 다시 와. 훈련 잘 해라."

여름이 지나고 가을 그리고 추운 겨울이 되었다. 방과 후엔 여전히 운동장에서 열심히 훈련하는 축구부 아이들이 보인다. 묵묵히 훈련하는 그 애들을 보면 어려움을 참고 견뎌 나가는 겨울나무를 보는 것 같다. 새 봄에 다시 기지개를 활짝 펴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그 나무들처럼 운동부 아이들도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좋은 내일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저는 2005년도에 강화도에 있는 강화중학교 도서실에서 사서 보조교사로 근무했습니다. 그 때 아이들이랑 참 친하게 잘 지냈습니다. 누구나 편하게 와서 책을 볼 수 있는 그런 쉼터로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2004년도에 비해서 거의 배 가까이나 대출자 수가 늘었더랬습니다. 돌아보니 참 행복했던 한 해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저는 2005년도에 강화도에 있는 강화중학교 도서실에서 사서 보조교사로 근무했습니다. 그 때 아이들이랑 참 친하게 잘 지냈습니다. 누구나 편하게 와서 책을 볼 수 있는 그런 쉼터로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2004년도에 비해서 거의 배 가까이나 대출자 수가 늘었더랬습니다. 돌아보니 참 행복했던 한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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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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