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장을 담갔습니다

배추 된장국으로 세월은 못 사도 건강은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등록 2006.03.06 19:53수정 2006.03.06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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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장을 담갔습니다. 2년만입니다. 식생활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자식들이 해외로 나가 있기도 하고 남편과 내가 된장보다는 청국장이나 청국장 가루를 많이 먹는 탓에 한 번 장을 담게 되면 보통 이삼 년은 두고 먹게 됩니다.


간장도 한 병쯤 남아있어서 내년에나 담을 생각이었는데 어제 대형 농협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탐스럽게 쌓여 있는 메주덩이를 보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예쁜 판매원 아가씨가 그런 나를 부추 켰습니다.
"내일이 경칩이면서 말 날이예요. 장 담그세요. 서비스로 장 소금은 그냥 드려요."
"장 소금을 그냥 준다구요?"
"네, 2.2kg짜리요"

a 메주가 탐스럽고 색깔이 아주 곱습니다

메주가 탐스럽고 색깔이 아주 곱습니다 ⓒ 김관숙

메주덩이들을 씻어놓고 나서 미리 풀어놓은 소금물 상태를 살피는데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남편이 와서 한마디 합니다.

"싱겁게 담그라구. 짜면 안 먹는 거 알지? "

별 생각 없이 그냥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조금 짜증이 납니다.

"간간할 정도로 맞췄어."
"얘들 자랄 적만 해두 고추장 된장은 없어서는 안 되는 찬이었는데."


나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내가 뭐라 맞장구를 치면 보나마나 또 귀에 익은 옛날 얘기들을 물고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추장 된장에 얽힌 자신의 어릴 적 추억부터 시작해서 옛 어르신들은 장독대와 장독들을 무쇠 솥뚜껑을 딱 듯이 청결하게 했다느니 무 시래기나 배추시래기를 넣고 끓인 된장국은 몰라서 그렇지 실은 뿌연 곰국보다 더 건강에 좋은 웰빙 음식이라느니 하고 말입니다.

"거 된장 시래기 국 생각나네, 저녁엔 묵은 된장으루 배추 국이나 끓이지 그래."
"어제 봤잖아, 세 포기 들어있는 한 망에 만천 원 하는 거. 그 비싼 걸로 국을 끊여?"

나는 면박을 줍니다. 가끔 남편은 장시세를 깜박하고는 합니다. 어제 마트에서 남편이 나 보다 먼저 배추값을 보고는 너무 비싸다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물 끼가 마른 메주덩이들을 항아리에 넣고 나서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항아리 위에 얹고 말갛게 가라앉은 소금물을 가만가만 떠서 붓습니다. 남편이 흔들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바구니를 잡았습니다. 소금물을 다 붓고 나자 메주덩이가 떠오릅니다. 말간 소금물에 둥실 뜬 메주덩이 색깔이 노르스름하게 피어났습니다. 잘 익은 된장 색입니다. 올해 역시 된장도 간장도 아주 맛있을 것만 같습니다.

a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거실 끝에 놓았습니다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거실 끝에 놓았습니다 ⓒ 김관숙

뒷정리를 모두 하고 나서 보니까 남편이 소파에서 책을 읽다가 말고 길게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코 고는 소리가 크게 났다가 안 났다가 합니다. 얇은 누비이불을 가져다가 덮어주고 돌아서는데 불현듯이 그의 벗어진 머리며 얼굴에 깊은 주름들이 가슴에 와 걸립니다. 늘 보는 모습인데도 딴 사람처럼 낯설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 나이에 새벽 수영을 다니면서 건강을 챙기는 남편이지만 세월 앞에서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손지갑을 챙겨들고 나섭니다. 구수한 된장 배추 국으로 흐르는 세월을 살 수는 없지만 남편의 건강은 조금이나마 살 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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