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마저 '소비'하는 시대, 시민사회의 재건을 위하여

[서평] 벤자민 R. 바버,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

등록 2006.03.08 19:05수정 2006.03.0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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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바버,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
벤자민 바버,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일신사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있는 시대다. 대형 할인점에서 쇼핑하는 일은 이제 문화의 한 부분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고, 유학알선이나 보험, 여행 서비스를 인터넷 쇼핑몰에서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화폐를 지급하는 것은 죄다 '상품'이고,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학생들은 수업을 '구매'하고, 국민은 국가의 행정을 '소비'한다. 그래서 '생산자'에게 지급한 화폐에 상응하는 품질과 서비스를 요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만이 두드러지게 남는다.


생산자-소비자로 구성된 사회에서, '시민'은 어떤 존재일까? 소비자들은 일상에서 소비함으로써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욕구는 생산자가 창출하는 것이지, 소비자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소비를 통한 욕구 충족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이다.

소비자가 일터로 가서 생산자가 되는 순간에도, '더 풍족한' 소비자로서의 삶을 위해 돈을 버는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되기 쉽다. 이런 지위에서의 삶을 '사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바로 '공적인 삶'이다.

자유주의도 공동체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서 '강건한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벤자민 바버는, 강건한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시민적 삶'이란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사적인 삶이 바로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삶이라면, 공적인 삶은 유권자이자 권리 주장자로서의 삶이다.

시민이 오로지 사적인 삶에 매몰된다면, '공적'인 것은 정부가 독점하게 되고, 정치는 정치가라는 전문 직업인의 영역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에 대해 다만 냉소적이 될 뿐, 잘못된 것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노동을 미덕으로 여기는 윤리 아래에서는 시민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갖기 쉽지 않다. 오늘날 시민단체 회원 중 많은 사람이 회비만 낼 뿐 활동에 참가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직업을 가진 사람은 직장에 '올인'하고, 직업을 구하지 못한 사람은 취업에 '올인'한다.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사람은 직장인의 몫까지 가사를 떠맡느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시장에서의 노동만이 능동적인 삶이라 간주하는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는 시간이 많은 것은, 가진자들의 특권이거나 게으른 삶의 표본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여가시간'이 필요하다. 시민은 다만 투표에 참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의 문제를 논의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실천하고, 공동체 삶을 영위할 시간이 필요하다. 벤자민 바버는, 우리가 그러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물질적 여건이 갖추어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과거에는 미국인 대다수가 자신과 동료를 위해 땅을 경작해야 했지만, 이제는 2%만이 농사를 지으면 된다. 농업 이외의 영역도 비슷하다. 신기술 도입과 효율성 강화로 노동력은 덜 필요하게 되고 있다.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 우리는 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는 일자리 나누기나 앳킨슨의 '참여소득'을 예로 든다. 모든 시민참여에 참여소득을 인정함으로써 생산성을 기준으로 하는 소득분배를 임금노동과 분리시키자는 것이다.

벤자민 바버는 이러한 시도들이 가능해지기 위해서, 시장에서의 노동만이 가치있는 삶이라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시민활동이 의무가 되고 임노동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여가시간은 무력하고 불안한 시간이 아니라 책임성과 시민적 의무를 생각할 수 있는 창조적 시간으로 변모할 것이며, 민주주의는 '강건한 민주주의'로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벤자민 R. 바버,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 이선향 옮김, 일신사, 2006

덧붙이는 글 벤자민 R. 바버,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 이선향 옮김, 일신사, 2006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 - OAK 003

벤자민 바버 지음, 이선향 옮김,
일신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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