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왜 그림책 바깥에 있을까?

그림책에서 배우는 아빠 노릇

등록 2006.03.11 12:40수정 2006.03.11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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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갖는 바람(또는 불만) 중 하나는 아빠가 아이 키우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리라. 회사에서나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면 요즘 아빠들 역시 다른 무엇보다 아이 키우는 일에 관심이 많다.

마음은 있는데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적지 않은 아빠들의 고민이다. 엄하거나 무관심했던 우리 아버지 세대를 떠올려 보면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배운 적이 없다.

나아지지 않은 경기 불황과 갈수록 높아지는 교육비 부담을 생각하면 일단 열심히 일하고 자리보전 하면서 어느 정도 소득을 유지하는 것으로 아빠 노릇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럴수록 아이들에게 내줄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드는 문제가 생긴다.

제대로 아빠 노릇한다는 것은 무얼 뜻할까?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던 그림책들 사이에서 작은 해답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림책은 아이들 생활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이 나오고 아빠 엄마도 중요한 등장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아빠들은 그림책 안에 있기보다는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

요즘 인기 있는 그림책 작가 중 하나인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는 늘 일에 쫓겨 자기와 놀 시간을 내 주지 못하는 아빠에게 불만인 딸아이가 등장한다. 물론 그림책 안에는 아빠가 있지만 늘 뒷모습이다.

고릴라 인형이 커져서 딸아이와 함께 놀러 나가는데 아마도 이 고릴라는 딸아이 환상에 존재하는 아빠의 다른 모습으로 여겨진다. <고릴라>에서 아빠는 환상을 빌어야만 그림책 안에 등장할 수 있는 셈이다.


아이들은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아빠들은 늘 일에 쫓긴다. 아빠들은 늘 '다음엔 꼭' 하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번번이 미루어진다. 이런 사정은 여기 서울이나 거기 뉴욕이나 큰 차이는 없는가 보다.

어떤 그림책을 골라 어떻게 읽혀 줄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어린이 그림책의 세계>라는 책이 있다. 좀 오래된 책이기는 한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 그림책 밖에 있는 아빠 역할에 대해 귀담아 둘 만한 이야기가 있다.


숲 속에서 동물들과 신나게 놀던 한 아이가 술래가 되어 눈을 감았다 뜨니 함께 놀던 동물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다. 바로 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온 것이다. '도대체 누구하고 얘기하고 있었니?' 아버지의 질문은 늘 이렇게 현실적이다.

상상 속으로 들어가 신나게 노는 것이 아이의 일이라면 그 아이를 현실 세계로 데려오는 것은 늘 아버지 몫이다. 잘 아는 동요에서도 '무지개 동산에서 놀고 있을 때 이리저리 나를 찾는 아빠의 얼굴'처럼 환상의 끝에는 늘 아빠가 기다리고 있다.

하야시 아키코의 그림책 <숲 속의 요술물감>도 숲 속으로 들어가 동물들과 함께 그림 그리고 노는 아이가 등장한다. 여기에 아빠는 등장하지 않지만 어느새 동물들은 사라지고 오빠가 아이를 찾으러 등장하는데 이 오빠는 아빠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은 상상 속에서 꿈을 꾸고 즐겁게 놀면서 자라난다. 그런 상상을 멈추고 현실로 데려 오는 것이 아빠 몫이라니 섭섭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빠라는 자리가 아이들의 동심을 멈추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어린이 그림책의 세계>는 아버지는 운명적으로 현실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지만 아버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안심하고 현실 세계에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영원히 꿈속에서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결국 현실 세계와 오갈 때 의미가 있고 아버지가 현실을 맡아 주기에 아이들은 동심을 가꿀 수 있는 것이다.

아빠들이 늘 샘 나고 아무래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엄마와 아이의 애착 관계다. 프로그래머인 친구 표현을 빌리자면 엄마와 아이는 하드웨어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고 아빠는 오피스 프로그램 정도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어린이 그림책의 세계>에서도 '어머니는 어린이와 일심동체 같은 존재지만 아버지는 그 모자 공동체를 보호하는 힘'이라고 한다. 결국 아버지는 현실에서 아이를 보호하는 울타리이자 동시에 아이에게 현실을 가르쳐 주고 현실로 이끌어 주는 연결 통로가 되는 셈이다.

다시 그림책 <나무 숲 속>으로 돌아가 보자. 도대체 누구하고 얘기하고 있었느냐고 아빠가 묻자 아이는 동물들하고 놀고 있었다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빠는 아이 혼자 놀고 있는 것을 분명 보았을 테니 '늦었으니 집에 가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 마디. '또다시 올 때까지 기다려 줄 거야'에 중요한 답이 담겨 있다. 아빠는 아이가 상상 세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현실로 이끌었지만 그렇다고 상상을 깨뜨리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해서 아이는 '안녕. 모두 기다려요. 다음에 산책 올 때 찾을 테니까요'하며 신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숲 속의 요술물감>에서 숲 속에서 동물들과 그림을 그리던 동생을 찾으러 온 오빠도 동물 친구들과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동생이 동물 친구들과 함께 그렸다고 내민 그림을 보고 '우와 굉장하다!'며 감탄한다. 아이들은 상상과 현실에 한 발씩 걸쳐두고 사는 존재여서 그 모두를 보듬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현실로 이끌면서도 아이만이 알고 있을 꿈과 상상을 이해하고 가꿔주는 것은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아빠들에게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아빠들도 처음부터 어른은 아니었다. 우리도 언젠가 상상 속에서 살아갔던 나날들이 있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아이들 등 뒤에 있는 상상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빠들이 아이들 등 뒤에 있는 상상을 배려할 때, 아이들은 아빠 등 뒤에 있는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내다볼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어린이 그림책의 세계>에 나온 입장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만 이 책이 좀 오래된 것이기도 해서 엄마 아빠 역할을 전형적인 성구분으로 다루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정의 형태도 다양해 졌고 성구분에 따른 역할들도 많은 변화가 있는 시대인만큼 이런 것을 반영하여 엄마 아빠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의 상상과 어른의 현실이라는 구도와 아이가 아이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어른의 자세는 중요하겠죠.
CSI 과학수사대에 나오는 부검의가 던졌던 '아이들이 보내는 유년기가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데 이게 아이들 책임이냐'하는 대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군요.

덧붙이는 글 <어린이 그림책의 세계>에 나온 입장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만 이 책이 좀 오래된 것이기도 해서 엄마 아빠 역할을 전형적인 성구분으로 다루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정의 형태도 다양해 졌고 성구분에 따른 역할들도 많은 변화가 있는 시대인만큼 이런 것을 반영하여 엄마 아빠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의 상상과 어른의 현실이라는 구도와 아이가 아이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어른의 자세는 중요하겠죠.
CSI 과학수사대에 나오는 부검의가 던졌던 '아이들이 보내는 유년기가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데 이게 아이들 책임이냐'하는 대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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