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일로드>는 '잡지라도'가 아닙니다

새마을호 잡지 레일로드

등록 2006.03.12 09:47수정 2006.03.1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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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구입비 제로 부끄럽습니다. 잡지라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단체에선가 독서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길거리에 내건 플래카드 문구다. 십여 년 동안 잡지계에만 몸담아서 그런지 이 플래카드가 얼른 눈길에 들어왔다. 작년에 우리나라 가구당 소비지출내역에서 신문, 단행본, 잡지 구입비가 모두 합해 월 1만397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문 구독료 빼면 책을 거의 한 권도 안 사본다는 것이고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구에 일면 공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쓰름했다. '잡지라도'라니? 잡지는 도서 중에 하위개념이란 말인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잡지하면 B급 문화로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 책임이 물론 이미지 관리를 소홀히 한 잡지인에게도 있겠지만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씨알의 소리> <사상계> <샘터> <뿌리 깊은 나무> <창비> <말>과 같은 잡지들은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A급 잡지들이었다. 그밖에도 구석구석에서 문화의 자양분 역할을 하고 정보 지식 산업의 선도자 역할을 하는 A급 잡지들은 많다. 어제 새마을호에서 만난 <레일로드>라는 잡지 또한 그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A급 잡지들을 만나 보셨나요?

충남 온양온천 부근에 있는 큰집에 다녀올 일이 생겨서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탔다. 혼자 기차를 탈 때면 옆자리의 승객이 누굴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총각 때 같으면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쁜 아가씨가 옆자리에 앉기를 바라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보다는 편안한 말벗을 만나기를 기대하거나, 아니면 조용히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행선에서 옆자리에 동행한 사람은 일흔 여덟 살의 멋쟁이 할머니였다. 교사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한 뒤에 충남 광천의 한 은퇴농장에서 여생을 즐기고 있다는 이 할머니는 연하의 남자(?)와의 동행이 싫지만은 않은지 미주알고주알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중 제일 인상에 남는 말 한 대목.


"우리 할아버지 잔소리 듣기 싫어서 내가 집에 안 있고 농장에 내려간다니까. 음식 타박은 왜 그리 하는지. 내가 그랬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거들랑 다음 생에는 여자로 태어나서 직접 해 드시라고…."

연구원 출신이라는 그 할아버지는 대단한 분이다. 밥 해주는 것만도 황송한 일인데, 감히 음식 타박을 하다니. 그나마 할머니가 맘씨가 고우니까 '황혼이혼' 안 당하는 거 아닐까.

아버지와 우동 한 그릇

큰집에서 볼 일을 보고 온양온천역에서 영등포행 새마을호를 차표를 샀다. 예전에는 그렇게 멀어보이던 시골길이 이제는 아주 가까워져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기차를 기다리며 선로를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경기도 파주에 살던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와 함께 온양온천역 바로 밑의 신창역까지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고 내려가곤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연착해대던 장항선 완행열차 타는 재미 중 하나는 평소 쉽게 맛보기 힘들던 삶은 달걀 까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일 아쉬웠던 것은 천안역쯤에서 우동 먹으라고 기차가 5분 정도 정차했는데, 단 한번도 내려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유난히도 정이 많았던 아버지가 아들 손잡고 내려서 따뜻한 우동 한 그릇 사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싶다. 그놈의 지갑이 가벼운 탓에….

상행선 열차의 내 옆자리에는 어깨가 널찍한 40대 초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머리는 짧은데다 백구두를 신고 있었다. 동네에서 힘깨나 쓴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인상이었다. 눈 붙이고 잠이나 자야지 하고 의자를 눕히고 기댔는데, 잠시 후 천안역에서 백구두 남자는 하차를 했다.

그리고 천안역에서 승차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얼굴에 '모범생'이라고 써 있는 이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시트에 꽂혀 있던 잡지 <레일로드>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레일로드>는 새마을호 승객들을 위해 비치된 월간 잡지이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지하철 같은 데서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관심이 가게 된다. 신문도 내가 구독하는 신문을 읽는 사람을 보면 다시 한번 얼굴을 보게 되고, 잡지도 내가 구독하는 잡지를 열심히 탐독하는 사람을 보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정서의 유대감 같은 것을 느낀다.

새마을호 승객이 모은 10억 원의 소년소녀가장돕기 성금

a 서울-천안을 기차로 출퇴근하는 전경식씨가 새마을호 안에서 <레일로드>를 읽고 있다.

서울-천안을 기차로 출퇴근하는 전경식씨가 새마을호 안에서 <레일로드>를 읽고 있다. ⓒ 최진섭

<레일로드>를 열심히 탐독하는 이 남자(전경식, 31)를 보면서 문득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독서를 방해하는 게 아닐까 싶어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잡지라도' 읽는 모습을 사진 찍어서 널리 알려주고 싶었다.

- 잡지가 재미있나 봐요?
"좋은 내용이 많네요. 여행 기사 보니까 기차 타고 가족들하고 이번 주말에 여행도 가보고 싶고요."

- 기차 자주 탑니까?
"서울-천안을 매일 출퇴근 하는 걸요. 한 달 차비만 20만 원입니다."

- 서울서 천안을 매일 기차 타고 다닌다고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수도권 지역에서 승용차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는 것보다 시간이나 교통비 면에서 더 비싸지 않은 걸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편안한 의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고요."

- <레일로드> 자주 보겠네요?
"한 달에 한 번씩 교체하는데 본 거 또 보고 또 보고 하기도 하죠. 그래도 이삼일이면 다 읽지만…."

- 어떤 기사가 눈에 들어오나요?
"이 잡지에 보면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 '사랑의 화원'이란 코너가 있는데, 매달 여기에 성금을 보내주는 사람들 명단을 쭉 읽어 보곤 하죠. 1만 원, 2만 원씩 성금을 내는 분들이 제일 많지만, 몇 십만 원 이상의 거액을 내는 분들도 적지 않더라구요. 이런 모습 보면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구나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저도 성금에 동참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기도 했는데 아직은 참가 못했습니다."

<레일로드>에서는 소년소년 가장 돕기 사랑의 화원 캠페인을 11년째 하고 있는데, 여기에 모인 돈만 10억이 넘는다고 한다. 10억이라는 돈도 적은 돈이 아니지만 이 돈이 순전히 <레일로드>를 읽은 새마을호 승객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모인 거라 생각하니 더 의미가 있어 보였다.

어느 새 '우리 열차'는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전경식씨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플랫폼을 빠져나오다 보니 매점에 꽂혀 있는 신문과 잡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다. 하여튼 앞으로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실 분들은 '잡지라도' 읽으며 여행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혹시 새마을호를 타게 돼서 <레일로드>를 읽게 되면 사랑의 화원에 후원금을 내는 여유로움도 지녀 본다면 금상첨화의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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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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