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의 수읽기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그가 내친 것은 무엇일까

등록 2006.03.13 10:22수정 2006.03.13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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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낮 서울시내 한 중식당에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이 자리에서 고 전 총리는 정 의장의 도움 요청을 사실상 거절했다.
12일 낮 서울시내 한 중식당에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이 자리에서 고 전 총리는 정 의장의 도움 요청을 사실상 거절했다.오마이뉴스
언론의 반응은 비슷하다. '예상대로'라는 반응이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고건 전 총리가 만나봤자 소득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적중했다는 것이다.

언론이 이렇게 예상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정 의장과 고 전 총리는 한배를 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게 하나다. 둘 다 전북 출신으로 호남 대표를 꿈꾸는 경쟁자라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서로가 상대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일을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 전 총리의 꿈이다. 고 전 총리는 제정당·정파와의 협력을 얘기했다. 열린우리당뿐 아니라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을 아우르는 대표로 옹립되길 원하는데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에 올인하면 다른 당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식적인 분석은 다음의 상식적인 전망을 낳는다. 고 전 총리가 지방선거 이후 한나라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을 아우르는 정계개편의 중심축으로 서고자 한다는 전망이다. 물론 이런 전망에는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 패배함으로써 자중지란을 보일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상식적인 분석과 상식적인 전망

상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경우의 수에 대입해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런 경우다.

고 전 총리의 입장을 추리다보면 모순점이 발견된다. 선거 연대를 하지 않는다면서도 다른 선거 연대를 암시했다. 대선이다. 정당 차원의 관여를 하지 않는다면서 제정당·정파와의 협력을 주장했다.


이 모순점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가장 속 편한 독해법은 시점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안 한다는 것이지 앞으로도 안 하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해석엔 빈 공간이 있다. 고 전 총리로부터 딱지 맞은 열린우리당이 뭐가 좋아서 '나중'을 약속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걸 모를 리 없는 고 전 총리다. 그럼 고 전 총리가 그리는 그림은 뭘까?


이 지점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고 전 총리가 지금 당장 함께 할 수 없다고 한 대상은 열린우리당인가, 아니면 정 의장 체제의 열린우리당인가?

이렇게 묻는 이유가 있다. 고 전 총리는 지난 2월 김근태 의원을 만나 "주파수를 맞추는 중"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 의장에 대한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정 의장은 고 전 총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반면 김 의원은 "기득권을 버릴 수 있다"고 말한 바도 있다.

사정이 이러했다면 고 전 총리는 셈을 편하게 했을 것이다. 정 의장 체제의 열린우리당과 연대해봤자 자신에게 떨어지는 배당 몫은 크지 않다. 반면 김 의원이 의장이 돼 연대했다면 지배주주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렀다. 같이 점심 먹는 자리에 김 의원 대신 정 의장이 앉았다.

이런 현실에서 고 전 총리가 꺼내들 최상의 카드는 꿈의 실현 조건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관건은 '정 의장 체제' 열린우리당의 성패다. 고 전 총리 입장에선, 정 의장 체제의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패배해 크게 흔들려야 공간이 열린다. 그래야 열린우리당 내 계파가 정당의 틀을 뛰어넘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하고, 그래야 자신의 입지가 강화될 수 있다.

현실은 과연...

고 전 총리가 정 의장 앞에서 참여정부를 비판한 대목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전 통일부 장관 앞에서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민생행보를 해온 열린우리당 의장 앞에서 민생을 챙기라고 주문한 데에는 선긋기 목적이 깔려있다.

선은 나누기 역할을 한다. '나'와 '남'을 나누는 게 선이다. 남을 배척하기도 하지만 '나'를 '우리'로 확대하는 구실도 하는 게 선이다. 계파가 정당의 틀을 깨는 상황이 연출될 경우 고 전 총리가 그어놓은 선은 이합집산을 가르는 기준점이 될 수도 있다. 고 전 총리 본인은 그걸 원할 것이다.

지방선거는 고 전 총리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김 의원이 고 전 총리를 향해 "기득권을 버릴 수 있다"고 말한 데에는 고 전 총리의 선거 협력이란 조건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고 전 총리는 그렇게 할 의사가 없다. 떡 쥔 손은 등 뒤로 감춘 채 빈 손을 뻗어 이삭만 주우려 한다. 이런 사정에서는 고 전 총리가 기대하는 계파의 움직임은 난망해질 수 있다. 고 전 총리는 정의장 체제의 열린우리당을 내쳤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결과는 열린우리당 자체를 내친 것이다. 김 의원 역시 전당대회 후 선거 연대 문제를 정 의장에 맡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설령 지방선거 후 이합집산이 이뤄진다 해도 그건 통합이 아니라 분열로 간다. 거래의 기초를 무시하는 행태가 '반 고건'의 정당성과 입지를 강화시켜 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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