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기념일, 봄눈을 먹으며 산에 오르다

대안학교 원경고의 미타산 등반

등록 2006.03.18 15:01수정 2006.03.1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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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 적중면에 있는 대안학교인 원경고등학교는 3월17일 개교기념일을 맞이하였습니다. 1998년, 오직 맨손으로 사명감 하나만을 움켜 쥔 채, 생활한복을 교복처럼 입은 학생들을 받아들이며, 학교 문을 연지 9년이 됐습니다.

원경고등학교는 매년 개교일을 등산으로 기념하였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갈 때마다 비명을 질렀죠. 개교기념일엔 놀아야지 힘들게 산을 오르다니! 게다가 어제(16일) 비가 흠뻑 내려 대지가 촉촉이 젖었었고, 저녁 무렵에는 기온이 떨어지며 눈발이 날려, 산이 미끄러울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산을 오르느냐고 징징 짜면서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선생님들이 아니었습니다. 원경고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은 대안학교답게 등산을 하는 거야! 이런 날 학교 뒷산을 올라가 호연지기를 기르며 학교 생일을 자축하면 안 되겠니? 하면서 아이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원경고등학교를 넉넉히 감싸고 있는 학교 뒷산의 이름은 미타산(彌陀山)입니다. ‘미타’라는 이름은 염불의 문구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에서 온 말로 서방 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 부처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미타불은 대승 불교 정토교의 중심을 이루는 부처로 수행 중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큰 서원을 품고 성불한 부처입니다. 이렇게 산 이름이 미타산이고 보면 더군다나 해인사를 품고 있는 합천이 불연 깊은 곳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아무튼 미타산은 학교 뒷산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높은 해발 662m로, 많은 산자락들을 거느리며, 적중면과 초계면 일대에 합천에서 가장 너른 분지를 이루어놓고 있는데, 적중면에서 보면 미타산이 학교를 안고 있는 형상이어서 원경고등학교와 미타산의 인연도 생각해보게 합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을 모아 간단한 안전교육을 하고 선생님들의 차에다가 아이들을 모두 실은 채 미타산 등산로 입구까지 가서 주차한 뒤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침엔 안개가 끼어 자욱하였지만 해가 밝아지자 이내 안개는 걷히었고, 산 아래에는 노란 산수유가 예쁘게 피어나 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a 봄눈에 덮힌 미타산

봄눈에 덮힌 미타산 ⓒ 정일관

아이들은 비온 뒷날의 싱그러운 산 공기를 맡으며 오이를 하나씩 손에 든 채 재잘거리며 잘 올라갔습니다. 저도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흐뭇하게 봄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산의 중턱은 어제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봄이 완연한 날에 눈 덮인 산이라니! 조심해서 발걸음을 놓았습니다. 아이들 몇은 장난기가 발동하였는지, 미끄러운데 뒤에서 잡는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여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습니다.


평지에서 우뚝 솟은 해발 662m의 산이라 올라가는 길은 좁고 가팔랐습니다. 제 앞에 여학생 한 아이가 무리에서 처져 있기에 같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같이 땀을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습니다. 아이는 여러 번 쉬면서 숨을 골랐습니다. 아이가 “힘들어요. 선생님” 하기에, 저는 “힘들지. 그런데 말이야, 사람은 힘든 과정을 겪어야 기쁨이 더 큰 거야. 지금 산을 오르는 것은 사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형태와 다르지 않지. 세상에 힘들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하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제 마지막 말이 물음인 줄 알고, “아니요”하고 대답하였죠.

a 해발 662미터의 미타산 정상

해발 662미터의 미타산 정상 ⓒ 정일관

오이를 다 먹고 난 뒤에 목이 말라 길 가에 녹지 않고 있는 봄눈을 곱게 쓸어 모아 먹었습니다. 차가운 눈이 얼음 조각처럼 아삭아삭 씹히며 녹아 물이 되어 목을 축일 수 있었습니다. 정상이 다가오자 저는 또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산을 오를 때, 언제가 가장 힘들까?” “정상에 가까울 때요.” 아이는 바로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지. 정상에 오르기 직전이지. 그런데 가장 힘든 그 때가 정상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임을 모르고 그만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지. 가장 힘든 그 때 눈을 질끈 감고 참으면 바로 정상인데 말이야. 앞으로 너도 세상을 살 때 힘든 일을 만나면 오늘을 생각해 봐라.” 아이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습니다. 그 아이와 제가 마음으로 소통되는 느낌을 받으며 문득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았습니다.


a 미타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적중 들판

미타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적중 들판 ⓒ 정일관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적중 들판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농지가 반듯하게 정리가 되어 있고, 그 들판 위에 학교가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과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 풍경을 내려다보며, 저 작은 곳에서 희로애락의 부침(浮沈)이 있었구나! 하는 감회가 들었습니다. 높은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일이 구차스러워 초탈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a 밝은 봄 햇살에 눈이 부셔요.

밝은 봄 햇살에 눈이 부셔요. ⓒ 정일관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점심 무렵에 내려갔습니다. 햇살이 따사로워 땅은 완전히 질척거렸고, 내리막길은 너무나 미끄러워 아이들은 엉덩방아를 찧기 일쑤였습니다. 어떤 아이는 아예 털썩 주저앉아 미끄럼틀을 타듯이 내려갔습니다. 교감 선생님은 그 와중에도 핸드폰 카메라로 아이들을 찍으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저도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하여 팔을 허공에 휘둘렀는데, 아이들과 조심조심 내려가는 재미도 참 좋아, 어느 정도 평지가 나오자 함께 노래도 부르며 흥겹게 봄을 탔습니다.

a 여학생이 개울물을 떠서 선생님 얼굴을 씻어드리고 있다. 그 위로 봄 햇살이 환하게 내리비친다.

여학생이 개울물을 떠서 선생님 얼굴을 씻어드리고 있다. 그 위로 봄 햇살이 환하게 내리비친다. ⓒ 정일관

산을 다 내려오자 개울을 건너는 길에 한 여학생이 찬 개울물을 손 우물에 떠서 더운 제 얼굴을 식혀주었습니다. 저는 얼굴만 내밀고 있었죠. 정말이지 자력이 생긴 이후에 세수를 남이 해준 건 처음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웃음이 미타산 기슭에 깨달음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대안학교의 개교기념일은 이렇게 봄볕처럼 따사로웠고, 대안학교 개교의 의미를 아이들과 함께 곱씹을 수 있어서 봄이 오는 길목이 더욱 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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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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