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물개바위 앞 해안가의 분초장 시절의 기자와 선임 박태호 하사, 보고싶은 선임 중에 한 명이다.임흥재
그런 대로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해안을 벗어나 예비대로의 귀환이 결정되는 날부터는 다시 지옥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침,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나 소위 갈고리 계급장을 단 해병들의 내무반입니다. 이곳의 율법은 단 하나이지요. '기수', 그것이 곧 법이자 모든 것입니다. 기수에 의해 존재가치가 정해지고 그 존재의 역할과 재량이 규정되어져 있습니다. 배움과 연령과 출신 그리고 능력 등, 이 모든 것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지요.
아래 기수는 위 기수의 노예로 살도록 율법은 정해져 있고 위 기수는 군림하도록 시스템은 완비되어 있습니다. 합리와 정당은 개에게나 어울리는 동물적 이성이요 굴종과 이유불문이 인간적 본능인 이상한 세상이 그곳입니다. 밤이면 정신무장 정신개조라는 지극히 형이상학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폭력과 구타라는 아주아주 형이하학적 수단이 광란의 축제를 엽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선배기수에게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제게는 후배기수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임관하여 12시간의 지겨운 항해 끝에 백령도에 내리고 불한당 같은 선배들만이 우글거리는 부대에 배치를 받았던 그 날의 불안과 공포처럼 저 역시 그에게는 불안과 공포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와의 첫 대면에서 제가 기억하는 것은 우선 큰 덩치와 그에 어울리지 않게 순박한 인상과 커다란 눈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가장 단순한 사고와 가장 단순한 본능만이 필요한 그곳에서 가장 단순한 절차를 거치며 함께 살게 된 것이지요.
지금에 와서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은 흐릿한 몽타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세월은 제게서 기억이란 것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습니다. 겨우 기억하는 것은 그가 저와 같은 일반하사(병역의무만 마치는)였으므로 조금은 각별한 느낌을 가졌던 것도 같습니다. 고약한 선배들 중 몇몇은 군번순 '집합'을 통해 (직업군인으로 입대한) 후배가 제 앞에 서는 더러운 자괴감을 심어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동거는 시작되었고 빨간 명찰을 먼저 달았다는 이유만으로 저는 그에게 늘 황제처럼 군림하면 되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때로는 저 역시 제가 받은 그 폭력을 고스란히 돌려준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부대에서 가장 기합 빠진 제가 후배들에게 기합이 빠졌다며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장 훈시와 굴종하는 삶을 무수히 강요하기도 하였을 것이지요. 그런 그와 또 다른 그의 동기가 제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