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만에 만난 백령도 해당화 중대 시절의 전우들, 동안이었던 얼굴이 온데간데 없는 선임도 있고 여전히 20대 같은 후임도 있고...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20대 때의 얼굴로 다가올 뿐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임흥재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습니다. 삼겹살에 소주가 곁들여진 조촐한 주안상이지만 스무 살 해병으로 돌아간 우리들에게는 더없이 풍성한 진수성찬입니다. 백령도의 우리들에게 소주는 늘 4홉들이 큰 병이었습니다. 아마도 작은 병으로는 다 채우지 못할 그 시절의 설움과 애증과 고민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주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어쩌다 주계(해병대는 취사장을 그렇게 불렀습니다)에서 싸구려 어묵 소시지라도 슬쩍 하는 날이면 그날은 대박이 터진 날이었지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안주는 고추장에 마른 멸치 그리고 라면 국물이었습니다. 선임들의 눈을 피해 해안가 포상 한 구석에 판초의(우의)를 깔아 놓고 술판을 벌일 수 있는 시간이래야 저녁 근무도 끝이 나고 다들 잠 속에 빠진 새벽시간뿐이었지요. 그것도 아주 가끔, 가뭄에 콩 나듯 주어지는 천운이 있어야 가능했었으니까요. 그 시간에 쫄병들끼리 수통컵에 쓰디 쓴 소주를 철철 넘치게 따라 놓고는 우리는 안주처럼, 아니 안주보다 더 맛나게 선임들을 씹어댔습니다. 술은 달기만 하였지요. 지옥 같은 쫄따구 생활이 더욱 고약했으니 술이 쓸 리 없었습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내 씹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참석하지 못한 그들이 우리의 안주가 되었습니다. 안주라고 다 같을 수는 없어서 역시 맛나고 즐겨 찾는 메뉴는 따로 있나봅니다. 누구의 입에서나 뱉어지는 이름이 단연 최고의 안주인 것이지요. 그 중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내가 제대한 후 부임한 선임 중에 악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선임의 기행담을 들으면서는 그 중 제일 빨랐던 저의 제대를 속으로 축복하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안주들이 오르내리고 그 안주들이 우리의 혀 안에서 알콜과 섞여 목 안으로 넘어가는 맛에 우리는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끄러운 일행의 소란에 눈살을 찌푸리던 옆 테이블의 손님들도 이내 우리의 사정을 눈치 챈 듯 대단한 인내심으로 참아 넘겨주었습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도 심심한 사의를 속으로만 표하며 우리는 중구난방 좌충우돌하며 적게는 2년여 많게는 수년 동안의 백령도 해당화 시절의 추억 속으로 잠겨 들었습니다. 누군가 부르기 시작한 '백령엘레지'란 사제 군가를 너도 나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아직도 저런 노래의 가사를 잊지 않고 있다니 제게는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였지요. 참석한 사람 중에 아직도 현역으로 남아 있는 맨 아래 후임의 선창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그 막돼먹은 군가가 우리에게는 어떤 성가보다 아름답고 은혜 충만한 그런 노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고달픈 백령도의 일상을 잊게 해주는 자장가였으며 납득되지 않는 군생활의 애환에 함께 울어주던 정겨운 친구의 다독거림이었고 거짓으로 위장한 해병대의 전설을 자랑하던 휴가철의 증거 같은 것이었지요.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 해병 곤조가를 자랑스럽게 부르던 그 시절이 어쩌면 가장 불우한 젊음이었고 또 한 편으로는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젊음은 또는 이 땅의 젊은이로 군역에 봉사하던 시절은 내가 태어난 조국이 가진 모순을 그대로 체험하고 증명하고 그래서 절망하면서, 끝내 극복하지 못했으면서 극복하고 나온 것인 양 기억의 저편에 묻어버린 바로 그 모순의 현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만난 우리가 한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난 시절의 그리움 속에서만 취해가다 헤어진 것은 바로 그 때의 한계가 남아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월을 잊고 그동안의 시간을 집안 깊숙이 감추고 나왔을지라도 우리의 무의식은 스스로 그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영위한 많은 흔적들을 챙기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 시간의 덮개가 내려 앉아 있는 우리의 얼굴 이면에 남아 있는 잔상들이 그것을 슬쩍 보여주다 이내 사라집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나 혹은 감추고 싶은 어떤 것과는 다릅니다. 어쩌면 바로 드러내기 어려운 그 사람만의 고유한 시간의 자국 같은 것이기도 하고 살아온 이력이 풍기는 독특한 냄새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