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면,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 둘 사이엔 촛불을 켜두어야 한다. 내가 굳이 말을 꺼내기야 했지만 사랑하는 날, 모든 이들은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이 마주앉았을 땐 그 둘의 사이에 가장 어울리는 불꽃이 촛불이란 사실을. 그렇다면 왜 사랑하는 사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불꽃이 그 여리디 여린 촛불이 된 것일까.
그것은 촛불이 공존의 빛이기 때문이다. 사실 명(明)과 암(暗), 즉 밝음과 어둠은 공존할 수가 없다. 그것을 확인하려면 그냥 방 한가득 어둠이 그득한 밤늦은 시간에 조용히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갑자기 스위치를 올리거나 내리면서 방안에서 일어나는 밝음과 어둠의 밀고 밀리는 싸움을 눈여겨 보기만 하면 된다.
불은 켠 순간, 밝음은 순식간에 어둠을 몰아내 버린다. 어둠은 구석진 곳으로 숨어 들어가 머리를 박고 빛의 추격을 뿌리쳐 보려 하지만 빛의 추격은 집요하기 이를 데 없어 아무리 구석진 곳으로 도망을 쳐도 칠흑빛 어둠의 몸뚱이는 허옇게 탈색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불을 끈 순간 상황은 급반전된다. 구석진 곳으로 몰렸던 어둠이 일시에 모두 방 한가운데로 뛰쳐나오며 가차없이 좀전까지 그 자리를 차지했던 빛의 목을 조른다. 빛이 숨을 거두는 데는 채 0.1초도 걸리지 않는다. 방안은 온통 어둠의 차지가 된다.
그 둘은 절대로 공존을 모른다. 밝음이 눈을 뜨면 어둠이 쫓기기 시작하며, 어둠이 밀려들면 밝음의 자리는 없다.
우리는 사랑했기 때문에 서로 만났고,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살지만, 그러나 빛과 어둠처럼, 사랑하는 우리의 사이에서도 충돌은 피할 수가 없다. 우리가 충돌하고, 그 충돌이 싸움으로 번지고, 그 싸움이 심해지면 우리는 공존을 모르는 빛과 어둠이 된다.
바로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이엔 촛불을 켜야 한다. 그 둘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도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디 한번 진한 어둠의 한 가운데서 촛불을 켜보라. 어둠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며 촛불이 제 빛으로 밝힐 밝음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리하여 어둠과 빛이 공존한다. 그 자리엔 어둠이 있고, 동시에 빛이 있다. 그렇게 어둠과 빛이 공존할 때면 어둠은 마치 빛이 안식을 구하는 편안한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기만 하다.
하지만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촛불을 켜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 중엔 형광등이나 알전구에 삿갓을 씌워 빛의 산란을 적당히 차단한 뒤, 단순히 조도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촛불 대신 쓰려 하기도 한다. 그 현대적 기구들의 이름은 '스탠드'라 불린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에 스탠드를 켜놓고 사랑의 분위기를 잡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짓이다. 스탠드는 어둠을 남김없이 몰아내고자 하는 현대적인 빛의 속성을 그 속에 은밀하게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탠드를 밝히는 순간, 어둠이 자리를 비켜주긴 하지만 동시에 어둠이 긴장하는 빛이 역력해진다. 어둠이 낌새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촛불이 아니라 언제 흉포한 빛으로 돌변할지 모를 위장한 촛불이 아닐까 어렴풋이 의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할 때 그 사이에 스탠드를 켜놓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짓이다.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긴장만큼 사랑에 치명적인 것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할 때는 둘의 사이에 반드시 촛불을 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