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 하나로 행복해지는 앙코르 여행

[바깽이의 앙코르 와트 여행기(마지막)] 아이들 천진난만 미소에 '감동'

등록 2006.03.31 15:36수정 2006.03.3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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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여자의 성'이라는 뜻의 반티아이 스레이. 크메르 예술의 극치라는 이곳의 건축술과 조각기법은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자의 성'이라는 뜻의 반티아이 스레이. 크메르 예술의 극치라는 이곳의 건축술과 조각기법은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박경

당신이 본 희망

"엄마, 앙코르가 조금 그리워지려고 그래."


천년 전 흔적엔 관심도 보이지 않고, 툭툭(오토바이에 탈 것을 부착한 교통수단) 타는 일만 행복해 하던 딸애가, 앙코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입을 열었다.

녀석, 이제야 그리움이 뭔지 조금 아는군. 진정한 그리움은, 멀리 떠났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앙코르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호텔 앞에서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는 콩의 '툭툭'을 타고 반티아이 스레이('여인들의 성채'라는 뜻의 사원)로 달렸다.

반티아이 스레이는 앙코르 유적군에서 30킬로미터 가량 뚝 떨어진 곳에 있는데,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꼽힌다. 나무에 조각을 한 듯 정교한 반티아이 스레이는 인도 영향을 받은 힌두교 사원이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까지 했다는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이 사원의 조각을 도굴했다가 들켰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화강암보다는 무르고 그리스 신전의 석회석보다는 단단하다는 사암으로 이루어진 반티아이 스레이. 그 사암에 새겨진 나뭇잎 무늬라든가 라마야나(인도의 서사시)의 장면들은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자줏빛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다.


a 반티아이 스레이 입구

반티아이 스레이 입구 ⓒ 박경


a 단단한 사암이지만 나무에 조각한 듯 정교하다

단단한 사암이지만 나무에 조각한 듯 정교하다 ⓒ 박경


a 박공벽의 다양한 조각들

박공벽의 다양한 조각들 ⓒ 박경

시엠립(앙코르와트가 있는 도시)을 향해 돌아오는 길에 만난 마을에서 툭툭을 세웠다. 캄보디아의 가난한 현실만 보았던 나에게 그 마을은 느닷없이 만난 낙원 같았다. 길 가에까지 늘어진 바나나 나뭇잎들, 달력에서나 보았음직한 열대 야자수들, 원주민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소박한 토산품들이 작은 수레 속에 도란도란 모여 있었다.

a 반티아이 스레이 가는 길에 만난 평화로운 마을길

반티아이 스레이 가는 길에 만난 평화로운 마을길 ⓒ 박경

사진을 찍기 위해 툭툭에서 내린 나에게 삽시간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원 달러(1$)를 외치며 아이들은 유적지 사진들을 내밀었다. 인쇄가 조야한 사진을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미 눈치 챘는지, 아이들은 제 또래인 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딸을 둘러싸더니 말을 걸었다.


"홧츠 유어 네임."

요것 봐라, 하얀 얼굴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어린 여행자인 딸에게 기가 죽을 법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들로 말을 걸어댄다.

"마이…네임 이즈…."

오히려 긴장해서 더듬거리는 건 딸이다.

나는 문득 가방에 과자가 남은 걸 기억해냈다. 그걸 꺼내어 아이들에게 하나씩 돌리니 딱 맞아 떨어졌다. 앞 다투어 손을 내민 아이들은 간절하고도 행복해 보였다. 한 아이가 음료수 캔을 발견하고는 그것도 달라고 했다. 이미 다 먹은 빈 캔이라는 걸 보여주자, 저들끼리도 우스운지 까르르 넘어간다. 천진하고 예뻤다.

a 딸애를 둘러싸고 스스럼없이 말을 걸다가도, 사진기를 들이대니 순진하게도 너무 얌전하고 어색해지는 아이들

딸애를 둘러싸고 스스럼없이 말을 걸다가도, 사진기를 들이대니 순진하게도 너무 얌전하고 어색해지는 아이들 ⓒ 박경

동남아 여행을 즐기는 대학동창 중에 사진을 아주 그럴 듯하게 찍는 친구가 하나 있다. 아직까지 결혼도 안 한 그 친구가, 당연히 애 한번 길러 본 적 없는 그 친구가, 미얀마나 라오스에 다녀올 때마다 왜 그렇게 아이들 사진을 찍어오는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부정부패가 극심하다는 캄보디아. 경찰 월급이 50달러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벌어들이는 건 우리 돈으로 한달에 3000만원이라는 캄보디아. 굶어 죽는 사람들은 없지만, 너댓 살짜리 아이들까지 호객행위에 나서는 곳 시엠립. 유적지 어디를 가도, 기념품이나 엽서를 파는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을 맞닥뜨릴 수 있다.

누구라도 가난하고 척박한 캄보디아의 현실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면, 그건 아마도 천진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눈망울에서일 것이다. 누구라도, 매연과 먼지 풀풀 날리는 시엠립에서 잠시 가슴 따뜻해졌다면, 그건 아마도 충실하고 순박하기 그지없는 콩과 같은 그곳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a 우리의 충실한 툭툭 기사 미스터 콩

우리의 충실한 툭툭 기사 미스터 콩 ⓒ 박경

다시 앙코르에

앙코르를 떠나온 지금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난 여행이 새록새록 새롭고 문득 문득 다시 달려가고픈 생각이 들곤 한다.

어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여행에서 막 돌아온 내 첫마디는 이랬다.

"너무 기대를 했나봐, 생각보다 별로던데."

그러나 돌아온 지 일주일, 열흘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언젠가 다시 갈 거야 꼭."

처음 유적지를 돌아볼 때에는 '민숭민숭'하더니, 아주 더디게 감흥이 살아나는 곳 앙코르. 경사 완만한 바닷가 파도처럼 찰랑찰랑 가슴 속에 차오르는 앙코르. 정이 들어야만 느낄 수 있는 앙코르. 떠나와서 더 정드는 앙코르.

마음속으로 벌써 다음번 앙코르 여행을 그려본다.

▲ 먼저, 여행 기간을 일주일쯤 여유 있게 잡는다. 앙코르 입장권도 일주일짜리 패스를 산다(1일 20$, 3일 40$, 7일 60$).

▲ 해설집이나 책을 너무 보지 말고, 처음엔 가벼운 유적지 두세 군데를 둘러본다. 말하자면 감동할 준비를 천천히 하는 것이다. 감동에도 연출이 필요하다. 앙코르 톰이나 앙코르 와트는 클라이맥스로 잡을 것.

▲ 꼭 가이드가 필요하다면, 목소리가 작은 가이드를 동반해야겠다. 사람 떼를 몰고 다니는 양치기 가이드가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내 눈과 가슴을 가리지 않고 속삭이는 목소리의 가이드라면 더 좋을 것이다.

▲ 앙코르 유적지는 언제 보느냐에 따라 감동이 다른 듯하다. 고즈넉한 석양 무렵, 붉은 돌덩이들이 더욱 찬란해질 때, 사람 없는 한적한 곳에서 돌덩이에 기대고 앉거나 누워 볼 것. 그리고 잠시 잠들어 버릴 것.

▲ 한 이틀쯤은 자전거 여행을 할 것. 하늘거리는 원피스 한 장쯤 준비해도 좋으리라.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거슬러 작고 소박한 유적지에 가 닿을 것.

▲ 앙코르를 여행하다 보면, 마음속에 차오르는 곳 하나쯤 생기게 되리라. 마지막으로 남겨둔 하루쯤은 그곳을 다시 찾아가 볼 것.

▲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위한 사탕을 잊지 말 것.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말하지만, 나그네에 불과한 나로서는, 그들의 얼굴에 천진하고 행복한 웃음을 잠깐만이라도 떠올리게 할 방법을 그 외엔 달리 알 길이 없다.


난 벌써부터 남편을 꼬드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애가 하도 덥고 지친다고 성화를 해대서 구경도 제대로 못했잖아. 아무래도 한 번 더 가야 될 것 같은데? 당신도 한번 가 봐야 하지 않겠어? 그 멋진 걸 나만 보고 온 게 아무래도 미안해서 말이야….

a 왕의 목욕탕으로 이용되었던 곳 '쓰라 쓰랑'. 이제는 동네 꼬마들의 수영장이 된 듯.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절묘한 순간을 포착!

왕의 목욕탕으로 이용되었던 곳 '쓰라 쓰랑'. 이제는 동네 꼬마들의 수영장이 된 듯.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절묘한 순간을 포착! ⓒ 박경


a 하교하는 아이들의 재깔거림이 햇살처럼 환한 곳 시엠립

하교하는 아이들의 재깔거림이 햇살처럼 환한 곳 시엠립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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