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E 대격돌! 실업 해결은 물건너가나

[프랑스] 25년의 고질병 '실업'... 팽팽한 대결 속에 시간은 흘러가고

등록 2006.03.31 16:47수정 2006.04.0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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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18일(현지 시각) 150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프랑스 전역에서 열린 반 CPE 시위.

지난 18일(현지 시각) 150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프랑스 전역에서 열린 반 CPE 시위. ⓒ 박영신


실업문제는 지난 25년간 프랑스 경제를 괴롭힌 고질병이었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면 어김없이 선결 과제로 실업문제를 꼽았다. 그러나 어떤 정부도 실업률을 떨어뜨리는 가시적인 처방을 내놓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는 10%대의 실업률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3백만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던 1993년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은 그때 이미 "실업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르는 사이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는 다양한 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실업률은 9.6%라는 위험한 수준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년실업이다. 현재 25세 이하 프랑스 젊은이들 가운데 23%가 실업상태다.

2005년 5월 새 총리에 오른 도미니크 드 빌팽은 카리스마를 가진 자신감 넘치는 인물로 오랫동안 시라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왔다. 드 빌팽 총리가 손꼽은 현안 역시 지난 시기 수많은 정치가들에게 소득없이 골치거리만 안겨 주었던 실업문제였다.

13년 전 "실업 해소 위해 할 일은 다 했다"... 그리고 지금

실업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은 일반적인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먼저 프랑스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점, 따라서 기업의 의도대로 해고를 쉽게 한다면 고용도 증가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의 신념은 이웃 국가가 증명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과 덴마크는 낮은 실업률을 자랑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기업이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노동법령을 규정하고 있다. 높은 실업률로 고생하고 있는 독일 역시 드 빌팽의 가정과 같은 관점에서 개혁안 채택을 준비 중이다.


드 빌팽 총리가 제안한 최초고용계약법(CPE:Contrat Premiere Embauche)은 청년실업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CPE는 고용주의 해고권한을 강화시켰다. 26세 미만 직원의 경우 입사 2년이 되기 전까지는 특별한 사유없이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에 무게를 두었던 기존 법에 비춰보면 엄청난 차이다. 기존 법안은 일반 노동자에게는 1개월 반, 전문직 노동자에게는 3개월의 수습기간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지난 3월 1일 프랑스 의회에서 CPE가 통과되자 분노한 학생들이 대학과 고등학교 교정을 뒤로 하고 거리로 몰려 나왔다. 주요 노동조합의 지지 속에 여론의 반응도 학생들 쪽으로 돌아섰다. 응답자의 66%가 "CPE가 철회되어야 한다"고 밝힌 최근 여론조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

3월 28일 CPE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연대를 확인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였다. CPE 반대 시위로는 최초의 전국적 시위였으며 총파업이 진행된 날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이런 대규모 시위는 낯선 일이 아니다. 드 빌팽 총리처럼 미테랑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알랭 쥐페 총리가 1995년 겨울 주도한 연금개혁안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대중교통과 우편 분야를 포함한 전 공공분야가 참여한 총파업이 3주간 진행되었다. 당시 총파업으로 프랑스 경제 전체가 발이 묶였고 연금개혁안은 결국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CPE 역시 마찬가지 기로에 서 있다. 정부는 CPE 개선을 위한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처럼 시사하고 있지만 법안 자체를 철회하는 일은 없다고 못박았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입장 역시 뚜렷하다. 한 마디로 '선 CPE 철회 후 협상'이다.

팽팽한 대결구도지만 한편에서는 물밑 협상이 진행되었다. 노동계와 정부는 지난 24일 모임을 가졌다. 다음 날은 학생측과 정부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가시적인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CPE의 앞날은 28일 전국 총파업, 그리고 야당인 사회당의 위헌 소송에 따라 30일 프랑스 헌법위원회가 내릴 판정 여부에 따라 중대한 고비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당은 CPE가 합헌 결정이 날 경우 135차례에 이르는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CPE의 향후 일정이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면서 지난 20여년간 10% 선에서 누그러질 줄 모르던 실업률에 대한 처방으로 노동문제를 개혁해 보려는 또다른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a 지난 28일 파리의 반 CPE 시위 모습.

지난 28일 파리의 반 CPE 시위 모습. ⓒ 조영표

빌팽 총리 : 비판과 대화는 뒷전, 대권경쟁이 중요해

CPE를 중심으로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고 있는 양 진영 모두 엄청난 국가적 에너지와 시간을 허비했다는 점에서 일정부분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먼저 드 빌팽 총리 측의 문제는 무엇인가. CPE는 그 내용 이전에 법안이 상정되는 과정에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CPE는 드 빌팽과 그의 몇몇 측근들이 밀어붙인 법안이었다.

이 법안에는 노조나 의회 심지어 내각 내 동료 정치인들의 목소리도 반영되지 않았다. 정부 안에서도 노사관계 장관인 장-루이 볼루가 CPE 구상 단계에서부터 반대 목소리를 분명히 했으며 법안의 윤곽이 드러나자 총리에게 강력하게 항의한 바 있다. 드 빌팽 총리는 이런 비판적 견해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던 것이다.

그의 독단적 처사는 의회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가까운 의원들의 조언도 듣지 않았고 다른 의원들의 비판은 귓전으로 넘겼다. 정부의 권한을 명시한 프랑스 헌법의 한 조항을 들어 의회의 토론조차 생략해버렸다.

법안 심의에 앞서 노동조합의 견해를 청취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는 그가 장관으로 재임하던 전임 정부가 제정한 2004년 법안도 위배해 버린 꼴이다. 2004년에 제정된 법안은 노동관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법안은 제정에 앞서 노동조합을 의미하는 "사회 동반자들"과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드 빌팽 총리가 앞뒤 가리지 않고 CPE를 통과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일면 수긍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드 빌팽은 CPE가 청년실업 문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전국적인 소요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프랑스는 서둘러 젊은 세대에게 보다 안정적인 미래를 제시해 주어야 했다. 특히 오랫동안 소외된 채 도시 외곽 빈민가에 살고 있던 젊은 층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정부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가 오랫동안 견지해 오던 노동자 중심의 법 감정에서 벗어나 다른 타협을 이끌어 내는 일은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사전 조율이 핵심과제였다. CPE의 경우 그런 대화는 전무했다.

드 빌팽 총리의 위기 의식은 프랑스 빈민층의 사회·경제적 상태에 대한 그의 진단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정치적 야망도 한 몫 했다. 그는 2007년 5월 대선에 나갈 유력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드 빌팽 총리는 여론조사에서 별다른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우파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에 대한 반응도 호의적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UMP의 총재이면서 강력한 정적이기도 한 사르코지 내무장관은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다. 사르코지는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단연 선두를 달리며 대통령 선거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드 빌팽 총리에게는 사회 양극화 해소뿐 아니라 대권경쟁도 중요했다. 점차 벌어지고 있는 사르코지와의 지지율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가시적인 성과를 손에 쥐어야 했다. 사르코지와의 대권경쟁 속에 사회 양극화 해소라는 당면 과제가 퇴색되고 있는 셈이다.

학생·노조 : 기존 노동법으로는 힘들다, 대안을 고민하라

CPE와 같은 새 법안이 마찰없이 통과되려면 수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아무리 많은 대화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소르본느 대학교 경제사 교수인 자끄 마르세유의 지적을 귀담을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는 한 번도 "대화와 의회 정치를 통해 차분하게" 개혁을 이뤄낸 적이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시위는 안정적으로 개혁을 수행하지 못하는 프랑스의 무기력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점차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는 학생들은 CPE라는 또 다른 부당한 법안이 사회적 약자인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키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항변한다.

자신들의 미래가 달려 있는 사회 현안에 적극 참여하고 행동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열정이 수많은 청년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는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데 그치고 있지 않는지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실업 상태에 있는 것보다는 다소 불안정하더라도 직업을 갖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인 학생들은 현 체제에 대한 대안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대안에 대한 고민은 반(反) CPE 진영의 두 번째 핵심 세력인 노동조합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프랑스 노조는 전체 노동인구의 10%만을 대표할 뿐이지만 이미 사회 공익의 수호자로 개혁안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세기 사회개혁을 위한 가열찬 투쟁은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뛰어난 사회보장제도를 프랑스에 안겨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변화를 거부하는 노동법도 탄생되었다.

21세기 이 시점에서 기존 노동법을 청년층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평생직업을 보장하고 9주의 유급휴가를 주며 60세 퇴직과 동시에 안정적인 연금을 보장하는 현행 법안은 소수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제도가 될 수 있다. 국민의 발을 묶을 수 있는 힘을 가진 공공 운송부문 같은 정부 산하기관에 속해 있는 일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현상을 유지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번역:이완기)

덧붙이는 글 | *피에르 주 기자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이며 현재 파리에서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의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피에르 주 기자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이며 현재 파리에서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의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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