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
사람들에게 있어 나이는 두 가지로 작용하는 것 같다. 하나는 나이가 생각의 폭이나 시야를 점점 더 좁히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더욱 자기 생각에 완고해지고, 그 생각 속에서 더욱 굳어간다.
생각이 굳어 있으면 말을 나누기가 어렵다. 나이든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했을 때, 일방적으로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 만큼 고역스런 경우도 없다.
그러나 나이가 정반대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엔 사람들의 나이 속에 그들의 삶이 담겨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숙성되어 간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이 속에 완고한 고집이 담기면 삶이 점점 더 굳어지지만, 그 속에 삶이 담겨 숙성이 되면 삶이란 것이 매우 단순하게 요약이 되면서 그 삶이 모든 이들을 향해 따뜻하고 넓게 열린다.
아마도 그런 삶을 가리켜 '지혜를 얻은 삶'이나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이정록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그 깨달음을 보고 있었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이정록, <의자> 전문
난 아직 나이를 덜 먹었나 보다. 이 나이쯤 되면 남들을 위해 의자를 내놓아야 하는데 아직도 어머니가 내놓은 의자에 앉아 쉴 때가 가장 좋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의자는 어머니가 내주시는 의자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다.
아마, 그건 시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의 어머니는 거의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시인의 어머니 얘기를 읽으면서 그 짧은 순간, 나는 잠시 그 어머니를 내 어머니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오늘 삶을 의자에 담아 내게 내밀어 주셨다.
풍경 좋은 곳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는 시골길을 지나다 누추한 집의 처마 밑에 놓인 의자만 보아도 그곳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예전에는 그저 녹슨 의자에 불과했던 그 의자에서 그곳에 앉았다 가며 조금씩 그 자리의 먼지를 닦아갔을 누군가의 엉덩이와 그 엉덩이의 온기가 떠오를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따뜻한 온기가 사실은 그의 엉덩이로 덥힌 온기가 아니라, 길 가는 나그네에게 잠시 동안의 휴식을 내준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에서 온 것이란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될 것 같다. 어머니는 의자에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얹어 삶을 담아 놓으셨고, 바로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의자는 더욱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