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년 중에 3할은 그랬지만 유독 못하는 친구가 몇 명 있었다. 그래도 6학년을 마칠 때는 한글을 다 익혔다.sigoli 고향-맛객
카랑카랑 목소리만 큰, 지 아부지가 행여 내가 구박한 걸 아신다면 어떻게든 우리집에 와서 따질 것 아닌가. 도리 없이 선생님께서 맺어준 인연에 순응하며 방과 후 그날 배운 걸 다 터득할 때까지 거드는 수밖에 없다.
"영희야, 오늘은 잘 헐 수 있지?"
"…."
"그려 알았응께 열심히 허자."
"…."
자존심이 있을 턱이 없는 아이가 부끄러워서라기보단 입에 풀칠을 한 듯 늘 묵묵부답이다.
"야, 알았응께 얼렁 하고 가자. 니도 집에 빨랑 가야잖녀?"
"잉."
"자 읽어봐."
"이…."
"그 다음?"
"……."
"읽어보라니까."
"……."
복장이 터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순'자에 막혀서 이순신을 읽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어머니가 만드신 가갸거겨 가나다라 표로 쉽게 한글을 깨친 나지만 이렇게까지 까막눈은 정도가 심하지 않는가. 30여 분을 골방 고리한 냄새가 나는 여학생 옆에서 애간장을 녹이며 글눈이 트이길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야, 영희야 그럼 내가 읽는 걸 따라서 해봐."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하여 읽었다.
"그럼 인자 니가 읽어봐라. 아까 선상님이랑 한번 읽었고 나랑 또 시번 읽었응께 괜찮을 것이여. 틀려도 괜잖당께. 찬찬히 읽어봐."
여지없이 내 기대를 저버리고 만다. 이제 운동장은 조용하다.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가서 뭘 하고 있을까? 꼴도 베어야 하고 어른들 일을 거들어야 하는 금쪽같은 엄중한 상황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아마도 아이들 몇은 집으로 가는 정지동 잔디밭에 누워 나른한 봄을 즐기고 있을 텐데….
책상과 걸상이랬자 다 합쳐도 서른 대여섯 개다. 해가 유리창에 발그레 걸렸다. 어제는 산수 구구단 중 4단을 일주일째 외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던가.
복습이 어느 정도 되어도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도록 선생님께 검사를 맡아야만 둘 다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오늘은 도저히 해볼 방법이 없다. 영희에게 책보를 싸라고 하고는 교무실에 계신 선생님께 갔다.
"슨상니임."
"왜?"
"딴 게 아니구라우 공부 끝마쳤습니다."
"그래?"
철끈으로 서류철을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 박천환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그래?"라고 했던 건 순전히 나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지 까마득히 잊고 계셨기 때문이다.
"슨상님 끝냈습니다."
"그래? 알았다. 집에 가그라."
선생님의 그런 태도에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화가 났지만 애써 참았다.
"야, 영희야 집에 가자."
마치 내가 무슨 죄를 지은 듯 기분이 나빠 책보자기를 손에 들고 학교 뒷길로 뛰어 집으로 갔다. 그 뒤론 하는 둥 마는 둥 시간만 때우다가 학교를 도망치듯 빠져 나갔다.
이튿날 아침, 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아이들은 병주가 사온 무른 고무 축구공을 차며 진땀을 뺐다. 우리는 하루 여섯 시간 동안 공부라곤 두 시간 정도밖에 가르치지 않은 축구광 박천환 선생님을 오백환짜리 두 장이라 했다. 아이들은 선생님께 땀이 식기도 전에 또 제의를 했다.
"슨생님, 우리 축구차요?"
"맞아요. 축구차게 해주세요."
평소라면 "그래 오늘 축구하자"라며 아이들보다 먼저 가죽 공을 들고 밖으로 나가시던 분이지만 오늘 따라 아무 반응이 없으시더니 버럭 화를 내셨다.
"급장! 앞으로 갖고 오니라."
"예."
"야 이놈들아 축구를 어떻게 차냐? 내가 너희들 같은 학생들은 처음 본다. 공을 차든가 볼을 차면 모를까 어떻게 축구를 차느냐 이 말이야. 다들 운동장으로 모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