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땐 '보맥이' 하며 천렵했지!

울력 다음으로 큰 보막이가 농사 시작이던 70년대

등록 2006.03.28 20:55수정 2006.03.2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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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요즘엔 보를 막지 않아도 되니 농사가 많이 수월해졌지만 왜 이리 더 힘겨울까요?

요즘엔 보를 막지 않아도 되니 농사가 많이 수월해졌지만 왜 이리 더 힘겨울까요? ⓒ sigoli.com

울력 다음으로 큰 대공사 보막이


울력이라고 명절에 동구 밖에서부터 마을 앞길을 수리하고 풀과 나무를 베는 등 길을 다듬을 때는 반드시 집에서 가장 실한 한 사람이 나가야 한다. 강제로 부과되는 일이라 우리 집에서 키가 큰 셋째 형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 대신 나가기도 했다.

이보다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농사에서도 절대 빠질 수 없는 날이 있다. 다름 아닌 보(湺) 막는 날이다. 수리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70년대 말까지는 이 일부터 해놓아야 본격적으로 논농사를 한다.

춘분 앞뒤로 소쟁이, 감난쟁이, 욋등, 참난쟁이, 핵교모탱이, 짐때거리, 소로골, 정지동, 빗가리, 항월, 붐웃골, 개밥모탱이 따위 작은 골짜기와 동네 앞을 죄다 가로지르는 큰 농수로까지 크고 작은 보막이가 한창인 때다.

논이 서너 집밖에 딸리지 않은 작은 곳은 그들끼리 알아서 사나흘 동안 진을 빼야 하고 더 산골짜기로 들어간 깊은 산중 논은 식구끼리 모든 일을 마쳐야 한다. 집집마다 바쁜 철이라 누가 와서 거들어주지도 않는다.

때로 소쟁이처럼 양지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들이 걸려 있는 경우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봇도랑을 고치고 물꼬를 보는 일까지 하루 안에 다 끝내곤 했다.


우리 동네에도 시멘트 가마니가 들어오던 1975년 이후 다소 일손을 덜었지만 그것마저 소쟁이와 마을 앞에 있는 몇 개 큰 보에 한하여 지급되었으니 수십 개가 넘는 보를 막는 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두 보를 제외하곤 아예 지급을 받을 수 없어 8월 태풍에 큰물이 져 바닥에 있던 큰 돌과 자갈, 모래, 흙, 비닐까지 죄다 쓸고 가니 해마다 몇 날 며칠이고 들러붙어서 보를 막지 않으면 못자리에 물을 잡기가 힘들다. 때로 아파서 일손이 없으면 그 해 농사는 아예 포기해야 한다.


a 2~3년 묵힌 퇴비, 거름은 땅에는 보약입니다. 기생충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예전엔 지게로 날랐습니다.

2~3년 묵힌 퇴비, 거름은 땅에는 보약입니다. 기생충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예전엔 지게로 날랐습니다. ⓒ sigoli.com

온 식구 거름지고 산골짜기 논으로 '보매기' 갔지

어린 우리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대개 산골짜기 위쪽에서부터 보를 막는데 봄이 채 가시지 않은 봄날 우린 천렵을 떠나듯 아침 일찍 갖가지를 챙겼다. 거름을 져 나르던 바지게에 삽, 괭이, 곡괭이, 쇠스랑에 낫과 삼태기, 바케스(양동이)와 작년 못자리에 썼던 비닐, 비료부대를 누르고 위엔 백철 솥단지를 올린다.

솥단지 안엔 시어빠진 김치와 된장 고추장에 고춧가루 마늘 몇 쪽에 양파 한 개와 쌀 세 줌이 들어 있다. 둘째 형까지 서울로 돈 벌러 갔기에 부모님과 고만고만한 형제가 함께 집을 나서면서 이런 가벼운 건 막둥이 아들 내 몫이었다.

셋째형과 누나, 어른들은 아침밥을 먹기 전부터 2년을 썩혀 발효가 다 되어 약간 김만 모락모락 날 뿐 똥냄새가 거의 없는 두엄을 지게 위에 다섯에서 일곱, 또는 아홉 번까지 싣는다. 누나와 어머니는 비료부대보다 세 배는 커다란 쌀가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출발했다. 이날 오리나 되는 차일봉 밑에 있는 다랑지 논밭에 퇴비를 내놓으면 한결 다음 일이 수월하기에 가는 길에 몽땅 옮기는 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주막이 있던 소로골 입구까지는 그래도 가파른 오르막길이 없고 달구지라도 다닐 수 있으니 다행이다. 한번 쉬고 나서 오르고 또 올랐다. 줄줄이 한 줄로 서서 가도 가시덤불과 사위질빵 따위 넝쿨이 걸릴 뿐만 아니라 내를 건너고 다시 올라채서 나무에 가린 낭떠러지에 비스듬히 난 길을 오르기가 쉽지 않다.

동정지에서 쉬고, 상수리나무가 많은 마을 공동 산 윗동정지에서 잠시 쉬었다가 내친김에 밭에까지 내달려 짐을 부리니 모두 숨을 할딱거린다.

a 바지게는 꼴이나 거름 때위 몽근 걸 많이 옮길 때 빠지지 않았습니다. 저걸로 참새도 참았지요.

바지게는 꼴이나 거름 때위 몽근 걸 많이 옮길 때 빠지지 않았습니다. 저걸로 참새도 참았지요. ⓒ sigoli.com

맨땅에 헤딩하듯 돌과 자갈, 뗏장을 떼어 보를 막는다

아그배나무가 있는 작은 폭포 쪽으로 풀숲을 헤치고 짜르르 엎드려 물을 쏙쏙 빨아 먹는다. 물 속이 환히 들여다 보인다. 속이 다 후련했다. 아직 이곳 산골짜기는 날씨가 추워 진달래가 망울을 터트리지 않았고 개나리만 노란 물을 머금고 있을 뿐이다. 조릿대가 많은 응달쪽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뭣들 허냐? 막둥이는 가서 연장 지고 와야제."
"알았어라우."

봄바람은 거세다. 비닐을 돌로 눌러 놓고 작업에 들어갔다. 맨 먼저 아버지가 묏자리 잡듯 사람덩치만한 큰 돌을 이리 들썩 저리 들썩 끙끙거리며 몇 개를 줄줄이 이어 붙인다. 셋째 형과 어머니도 거들었다. 나는 여름에도 5분 이상 발을 담그고 있기가 두렵게 물이 차가워 머뭇거리고 있었다.

"니째야 비료푸대 갖고 오니라."
"예."

이제 거의 밑바닥 자리는 잡힌 듯하다. 비료부대와 너덜거리는 못자리 비닐을 줄줄이 놓고 물 속에서 돌멩이를 꺼내 올린다. 나와 누나는 주변에 널려 있는 돌을 한 번에 두세 개씩 가져다 날랐다.

아버지는 원체 상류라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자갈과 모래를 쇠스랑으로 득득 긁는다. 형과 어머니는 그 옆에서 괭이로 삼태기에 담아 둑에 쌓았다. 벌써 도랑 아래쪽엔 흙탕물이 조금 섞여 있을 뿐 물이 한껏 줄어 있다. 봇둑 옆 산자락 모래밭에서 건성건성 삽질을 하다가 아버지를 불렀다.

"아부지, 보 아래께 물이 봍아부렀어라우."
"시째랑 가서 고기 잡아라."
"야 신난다. 성 언넝 와. 고기가 뒤집어진당께."
"알았어. 바가치 각고 가면 되지?"
"잉, 내 국그럭도."

두 분이 삽으로 풀과 모래흙이 섞인 뗏장을 떠서 연거푸 던지자 정말이지 물이 바짝 말랐다.

a 초등학교 내내 그 일을 했지만 늘 고기 잡는 건 내 차지였습니다. 손으로만 잡아도 그리 많던 고기가 다 어디 갔을까요?

초등학교 내내 그 일을 했지만 늘 고기 잡는 건 내 차지였습니다. 손으로만 잡아도 그리 많던 고기가 다 어디 갔을까요? ⓒ sigoli.com

보를 막고 있는 동안 아래서 막둥이는 물고기 잡았다

"성 뭣부터 잡을랑가?"
"아무 꺼나 다 잡아도 됭께 보이는 족족 줏어 담아."
"깨구락지는?"
"괜잖다니까."
"오, 여그 까재 기어간다. 원매 시 마리나 가네."

크고 작은 가재를 담고 나자 신이 났다. 바위틈으로 숨을 데가 거의 없는지라 낙엽과 풀숲만 살짝살짝 뒤지면 고기가 꿈쩍도 않고 있다. 이번엔 거무튀튀한 중보때기와 모자때기가 비늘을 하얗게 뒤집고 있다. 망둥이도 보였다. 민물새우 새비와 징거마리 찡거미가 후다닥 튄다.

"성, 채기사리 있어 워떡해?"
"그냥 담아부러."
"글다 쏘면 아풀 것인디."
"그래 쩌짝으로 비껴봐."

형이 담으니까 쏘가리가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을 낙엽색을 닮은 개구리 두 마리까지 더해 20여 분 정신없이 담다 보니 두 그릇은 족해 보였다. 추운 줄 모르고 잡았지만 손이 곱아왔다.

"아부지, 나이타 좀 주싯쇼."
"나무때기나 모다놓아라."

형과 나는 냇가에 걸린 뼈대만 남은 나뭇가지를 모았다. 쏘시개로는 밭가에 가서 작년에 베어놓은 검불과 함께 잔뜩 들고 폭포가 시작되는 너럭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큰 돌 두 개를 놓고 서너 개 더 받혀 솥단지를 걸고 물을 약간 잡고 나니 꿈쩍도 하지 않는다. 불구멍을 약간만 터주고 거의 다 막았으니 불날 염려는 없다.

잠시 후 아버지께서 6. 25 때 얻었다던 지퍼 라이터로 불을 지폈다. 점심 때 무렵부터 따스한 해가 있어 좋았지만 바람은 한시가 다르게 오후로 갈수록 거세다. 확 불길이 타올라 그을음을 날리며 눈썹을 약간 태웠다.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별일은 아니다.

마른 가지만을 골라 하나둘 올려주자 꽃바람에 부르르 잘도 탄다. 그 사이 형과 누나는 다슬기 대사리를 한 줌씩 주워와 솥에 넣었다. 어찌나 나무가 잘 말랐는지 연기 하나 나지 않았다.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일만 하시던 어머니는 물고기 비린내가 풍겼는지 어느새 오셔서는 된장과 고추장 따위 가져온 양념을 집어넣고 휘저었다.

"니째야 시방부터는 살살 때도 되겄다."
"예. 글먼 쌀은 언제 넣간디요?"
"한 번 폴폴 끓으면 털어 넣고 가만두면 푹 퍼징께 걱정 말그라."
"알았어라우. 불만 보고 있으께요."

a 어죽 먹는 요령은 첫번째는 조금 푸고 다음에도 식기 전에 다 먹을 수 있는 양만큼만 풉니다. 욕심을 줄이면 됩니다.

어죽 먹는 요령은 첫번째는 조금 푸고 다음에도 식기 전에 다 먹을 수 있는 양만큼만 풉니다. 욕심을 줄이면 됩니다. ⓒ sigoli.com

어죽 끓여 세 그릇씩 먹고 봇도랑치우고 해거름에야 집으로...

흙일이란 원래 고되다. 돌까지 들어올렸음은 물론 올 때 퇴비까지 지고 왔으니 벌써 새참을 먹어도 한참 전에 먹었어야 했다. 간절하게 배가 고프지만 물로 배를 채우고 불을 보는 특권을 누린 나는 다 익었는지 본다며 뚜껑을 몇 번이나 열어서 징거마리 한 마리와 가재 한 개를 몰래 집어넣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작은 돌을 불 위에 살짝 눌러놓고 어른들과 형들이 일하고 계신 봇도랑으로 갔다.

"아부지 쌀 다 퍼졌을 것이요."
"그래, 묵고 허자. 시장해서 심아리가 한나도 없구먼. 자 다들 가자고."
"금순아, 낫은 잘 챙겨야 헌다."
"엄마꺼는 챙겼지라우?"
"그려."

국자도 없다. 그릇과 숟가락에 김치뿐이다. 잔가지를 불 위에 올렸더니 쌀이 살아 있는 듯 둥둥 떴다가 가라앉는다.

"직아부지 언넝오싯쇼."

아버지 몫으로 한 그릇 떠놓았다. 알아서 고기가 부서져 있고 가재와 징거마리, 새비가 빨갛게 식욕을 자극한다. 흥건하게 물이 조금 더 있을 뿐 푹 퍼져서 어죽이 되었다. 아버지가 어서 오시길 기다리며 숟가락을 쪽쪽 빨고 있다.

a 시멘트로 해서 주변에 나뭇가지나 흙이 들이칠 일이 없으니 한결 수월해졌으나 이젠 고향마을 흉물이 되어 보기가 조금은 사납습니다.

시멘트로 해서 주변에 나뭇가지나 흙이 들이칠 일이 없으니 한결 수월해졌으나 이젠 고향마을 흉물이 되어 보기가 조금은 사납습니다. ⓒ sigoli.com

"언넝 숟가락을 들어야제라우."
"요놈 각고 오니라고. 한참 찾았단 마시."

웃옷에 넣어온 내 아버지 친근한 벗 삼학(三鶴) 소주 25도짜리가 들려 있었다. 그릇에 콸콸 가득 따르시더니 국물을 뜨고 예전 그 소리 "캬-"를 반사적으로 내신다. 그 맛을 나는 아직 모른다.

이때부터 우리도 "후루룩 훕!" "쭙쭙!" "훕" 소리를 내며 물고기를 뼈째 씹었다. 밥도 적당히 퍼져 부드럽기 짝이 없다. 새우 종류는 시각을 일깨워 잠자던 미각을 되살린다. 여기에 다슬기까지 있었으니 국물도 시원했다.

솥 가까이 있던 누나에게 그릇을 내밀자 또 한 그릇 퍼준다. 아버지도 오랜만에 칭찬을 하셨다. 그릇 수가 쌓여감에 따라 더 걸쭉해지면서 참맛이 났다.

해거름에 출발하여 집으로 달려오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우린 그렇게 해마다 이른 봄 천렵을 겸한 보막이를 떠났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고향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골아이 고향 ☜ 바로가기를 누르시면 아련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고향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골아이 고향 ☜ 바로가기를 누르시면 아련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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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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