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조미료 같은 감성만화는 이제 그만

[별★난루키 1] <휴머니멀>의 박순구

등록 2006.04.05 17:11수정 2006.04.10 20:37
0
원고료로 응원
<휴머니멀> 중 '아름다운 미소' 편.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휴머니멀> 중 '아름다운 미소' 편.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박순구
전쟁터에서 맞는 죽음의 순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때늦은 후회를 하는 흰쥐, 손가락이 잘린 채 호송차 창에 기대어 우는 오랑우탄,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신을 버린 주인을 그리워하는 치와와….

보는 이의 콧등을 시큰하게 하는 이들의 표정에 주목하라. 그들은 따뜻하다. 그리고 슬프다. 삶이라는 게 어차피 슬픈 게 아니었던가. 산다는 것은 무릎이 덜덜 떨리도록 두려운 일.


동물의 눈으로 세상보기 <휴머니멀>

반추 혹은 거리두기, 혹은 되돌아보기… 그렇게 우리 사는 모습을 다시 바라봤다. 소외되는 것들에 대한 작은 슬픔과 위로. 이러한 그의 작은 '세상 이야기'가 사람들의 감성을 두드렸다. 바로 단행본 <휴머니멀>을 통해.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휴머니멀에 대한 관심이) 나이대와도 관계가 있는 듯해요. 제가 72년생인데 그 즈음의 감수성을 가진 분들이 공감을 해준 덕에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휴머니멀>은 단순히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웹상에서 효과적으로 잘 전달할 수 있었던 덕에 호응이 온 게 아닐까요."

주인공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업했던 경우도 있지만, 제 힘으로 낸 첫 단행본이라 더욱 의미가 있죠. 그리고 이렇듯 사랑해 주시니 감사해요."


예비만화가 생활만 몇 년... 꿈은 이루어지다

박순구 작가
박순구 작가홍지연
만화가 박순구. 2000년도부터 그는 '예비 만화가'로서 살기 시작했다. 더 멀리는 만화잡지 <보물섬>을 읽으며 자란 탓일까. 막연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학창 시절 내내 미술부에 속했었고, 당연한 수순처럼 미대(안동대 서양미술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시절에는 국전에도 나가고, 가끔 만화 공모전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신통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2000년 '만화를 사랑하는 넷'이라는 공모에 붙어 작가로 키워주겠다는 말에 선뜻 서울행을 결심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3개월쯤 지나 '만사넷'이 문을 닫게 된 것. 올라온 김에 캐릭터 관련 회사에 취직을 하고 애니메이션 콘티와 게임 디자이너 등의 일을 하면서 다시 준비를 했다. 이듬해에는 동아LG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꽤 낡고 오래되어 아름답거든>이 장려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서 정식 데뷔하게 된다.

2002년도에는 한 스포츠신문이 연 공모전의 부상으로 인터넷 연재 코너가 주어졌는데 그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연재에 매진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3개월 만에 끝이 난 잠깐의 운이었다.

"연재를 하다 회사의 입장으로 일방적으로 접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작가의 권리를 정할 수 있는 부분도 계약서상에서는 상당히 한정적이거든요. 엠파스에서 사장될 뻔한 <위대한 캣츠비>가 다음으로 옮겨가 살아난 경우처럼. 뭔가 대책이 필요한데… 그런데 만화는 매체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자리를 굳히지 못한 소외된 장르죠."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그가 '만화가를 대표하는 변'을 늘어놓았다.

우리의 지금, 희망과 사랑에 대한 우화

<휴머니멀> 중 유기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사랑합니다'편.
<휴머니멀> 중 유기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사랑합니다'편.박순구
여러 번의 낙담 때문인지 그도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을 위한 프로필을 마련하고자 조그맣게 문을 연 '순구닷컴(www.soon9.com)'에는 그간 살뜰하게 모은 관련 콘텐츠들이 꽤 모였다. (박순구의 휴머니멀 바로가기)

순구닷컴을 통한 꾸준한 활동. 어쩌면 넋두리나 독백과도 같은 그의 세상 향한 말걸기가 빛을 발한 건 <휴머니멀>의 첫편인 '흰쥐 이야기'가 탄생하면서다. 황매출판사는 그의 여러 편의 단편을 엮은 책을 기획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고, 작가의 노고는 지난해 5월 책으로 묶여 나왔다.

홍지연
의인화한 동물이야기. 제목 그대로 '휴먼' 더하기 '애니멀'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이야기다. 일상에 침투해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 전쟁, 이주 노동자, 유기견 문제…. <휴머니멀>은 우리의 '지금'을 말하는 우화다. 하지만 결코 비틀려 있거나 허투루 얘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절망 속에서조차 비관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희망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보는 이의 눈물과 인간성을 일깨운다.

"이라크 전쟁 등 시기적인 문제도 조금 맞물려 있었지만 만화를 그리면서 얘기하고 싶었던 바가 컸어요. 만화를 통해 사회적인 부분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열혈'파는 아니지만 시사뉴스를 보면서 '저러면 안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요모조모 옮겨온 것이죠."

이 젊은 작가는 어느새 가장 단순하고도 세련되게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감수성 넘치는 시처럼 뭉클한 대사들과 사랑스런 표정을 가진 캐릭터들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만화그리기'로. 그리고 세상은 기꺼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2005 BICOF에서 '청소년 만화상'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그해 대한민국 만화대상 신인상의 영예를 안았다. 무엇보다 대중이 그를 반가이 맞았다. 평단 또한 그의 작가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봤다. 격주간 <기획회의>의 한 만화평론가는 <휴머니멀>의 박순구를 이렇게 평가했다.

예쁘지 않은 세상도 감성만화에서 그리고 싶다

<푸리리툰> 중 '평화를 주세요' 편.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을 이야기했다.
<푸리리툰> 중 '평화를 주세요' 편.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을 이야기했다.박순구
"수많은 에세이툰이니 감성만화니 하는 것들이 항상 인간성을 이야기하고 따스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 인간성과 따스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말랑말랑한 감성의 달콤한 조미료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이라는 '진국'에 대한 직시다. <휴머니멀>이 한참 에세이툰이 붐을 이루었던 2~3년 전에 나왔더라면, 이쪽 장르는 아마도 지금보다 수십배 더 좋은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작지 않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만화가로서 느끼는 현실은 만만치가 않다.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지 2월 말로 버디버디에 연재되던 <어쿠어쿠>도 연재가 종료된 상태.

이럴 때면 그는 자신의 펜네임 '오기'를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추스른다. 본래 '다섯 개의 기운' 혹은 아무 뜻없는 별명이지만 요즘 같은 땐 정말 이름 그대로 오기를 부려본다.

"만화를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세상 모든 만화가가 아마 같은 말을 할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이니까,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리죠. 아무리 힘들었어도 이제껏 만화가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만 바라는 것은 현실이나 현실고 때문에 아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거죠. 저를 담는 작업, <휴머니멀>처럼."

분명한 것은 순구닷컴에 휴머니멀들만 사는 게 아니라는 것. '미운오리새끼', '돼지고양이', '해피배추's'… 끄적끄적, 조금씩 낙서를 하다 보면 튀어나오는 캐릭터들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쩌면 '로봇이 나오는 그림동화'도 펼쳐질 듯싶다. 전작인 <휴머니멀>보다 색감이 화려하고 보다 비주얼적인 일러스트가 다시 한번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게 될지도.

이렇듯 적잖은 캐릭터들이 우글거리는 이 작은 왕국의 주인은 어딘지 백지를 닮아 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기 때문일까. 무슨 상관일까.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길다면 긴 만큼 맞아주리라. 대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니.

<휴머니멀> 중 '나에게 쓰는 편지' 편. 잊고 있던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일깨운다.
<휴머니멀> 중 '나에게 쓰는 편지' 편. 잊고 있던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일깨운다.박순구

덧붙이는 글 | 박순구의 휴머니멀 바로가기

이제 막 눈부신 꽃망울을 피워내는 사람들, 그러나 앞으로의 빛깔이 더욱 기대되는 사람들. '별★난루키'는 출중한 실력에 넘치는 가능성을 가진 젊은 만화가들을 만나보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NEWS의 새 코너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NEWS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박순구의 휴머니멀 바로가기

이제 막 눈부신 꽃망울을 피워내는 사람들, 그러나 앞으로의 빛깔이 더욱 기대되는 사람들. '별★난루키'는 출중한 실력에 넘치는 가능성을 가진 젊은 만화가들을 만나보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NEWS의 새 코너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NEWS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2. 2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3. 3 남자를 좋아해서, '아빠'는 한국을 떠났다 남자를 좋아해서, '아빠'는 한국을 떠났다
  4. 4 수렁에 빠진 삼성전자 구하기... 의외로 쉽고 간단한 방법 수렁에 빠진 삼성전자 구하기... 의외로 쉽고 간단한 방법
  5. 5 관광객 늘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제주 사람들이 달라졌다 관광객 늘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제주 사람들이 달라졌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