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과 영화를 누렸던 에페스

[2주간의 터키여행] 고대도시 에페스

등록 2006.04.17 20:33수정 2006.04.17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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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날 때 몸과 기분이 좋지 않더니 결국 침대에서 10시를 넘겨 버렸다. 여행 막바지가 되니 기운이 많이 빠진다. 아무리 쉬면서 다니려고 노력했어도 짧은 휴가에 이렇게 먼 곳까지 왔으니 알게 모르게 정신 없이 보낸 것 같다.

숙소에서 우리에게 아침을 주시는 분이 내 힘 빠진 얼굴을 보고 말을 건다.


“한국 사람들 고추 좋아하죠? 고추 가루 팍팍 뿌려서 먹어요. 생 고추 따줄까요? 여기 정원 어딘가 뒤지면 고추 몇 개는 구할 수 있어요.”
“여기 수박 먹고 씨앗 잘 뱉어야 해요. 안 그러면 뱃속에서 수박이 자랄 거예요.”
“뱃속에 수박이 자라면 한국에 돌아가서 팔아요. 그 돈으로 다시 터키로 여행 와요.”

진지하게 생긴 분이 내 옆에서 이런 원초적이고 썰렁한 유머를 구사하는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방송이 나온다면서 자신이 보던 텔레비전 채널도 돌려주시기까지 한다. 잠시나마 웃으니 조금 힘이 난다. 이제 그 유명한 에페스로 출발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냥 걸어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르는 길을 걸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이름 모를 들풀들도 만날 수 있고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도 만날 수 있고 멋진 하늘도 더 오랫동안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컨디션으로는 차를 타야 했다.

오는 길에 걸어올 생각을 하고 차에 올랐다. 차 속에서는 멋진 하늘도 시원한 바람도 만날 수 없지만 아주 쉽게 에페스 앞에 도착했다. 클레오파트라 머리를 한 픽업 차량 아주머니는 두 시간 뒤에 돌아와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두 시간은 너무 시간이 적은 것 같고 걸어서 갈 생각에 사양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에페스에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 있는 교인들을 위해 서신을 보냈는데 이것이 신약성경의 에베소서이다. 항상 에베스는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경건하게만 보았는데 이곳의 실상은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곳은 무역을 바탕으로 한 찬란했던 고대 도시였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다산의 신인 아르테미스(Artemis)를 섬겼다. 시민들이 모이던 대형 원형 극장은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원형 극장과 바다를 연결하는 마차 길은 넓고 화려했다.

a 에페스의 대형 원형 극장

에페스의 대형 원형 극장 ⓒ 김동희

발과 여자 그리고 돈과 하트가 그려져 있는 돌은 환락가임을 알려주었다. 공중 목욕탕과 공동 화장실 그리고 화려했던 사원들과 집들이 가득했다. 돈과 권력 그리고 향락이 가득하고 풍요로움을 누렸던 도시였던 것이다.


a 환락가 표시. 그려진 발보다 작은 발은 가진 남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환락가 표시. 그려진 발보다 작은 발은 가진 남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 김동희


a 공동 화장실.

공동 화장실. ⓒ 김동희

하지만 이 번화했던 도시도 자연의 위력 앞에 쇠퇴해질 수밖에 없었다. 항구에서 바로 이어졌던 이 도시는 지진에 의해 바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은 줄어들었고 사람들도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있었다는 바다는 지금 항구로 바로 이어주던 도로에서 7km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바다는 이제 보이지 않았고 화려했던 이 도로는 세월의 힘에 무너지고 잡초들로 덮여 있다.

a 바닷가와 연결됐던 길. 지진으로 바다는 7km 멀리 떨어졌다.

바닷가와 연결됐던 길. 지진으로 바다는 7km 멀리 떨어졌다. ⓒ 김동희

많은 볼거리 중 에페스의 가장 멋진 것은 역시 셀서스(Celsus)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서기 135년에 이곳의 집정관이었던 셀서스가 죽자 그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이 도서관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도서관의 모습과는 다르다. 안쪽과 바깥쪽 벽 사이 1m 공간에 책을 넣어 보관했다고 한다.

a 멋진 모습으로 서있는 셀서스 도서관

멋진 모습으로 서있는 셀서스 도서관 ⓒ 김동희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더욱더 빛나게 해주는 것은 네 개의 여신상이다. 정면에는 지혜(Sophia), 미덕(Arte), 학문(Episteme), 생각(Ennoia)을 상징하는 여신상이 기품 있게 서 있다. 비록 진품은 오스트리아 빈의 박물관에 있고 이곳에 있는 것들은 모조품이긴 하지만 말이다.

a 셀서스 도서관의 여신상. 진품은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셀서스 도서관의 여신상. 진품은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 김동희


a 셀서스 도서관의 여신상. 진품은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셀서스 도서관의 여신상. 진품은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 김동희

누가 보물 찾기 시킨 것도 아닌데 책에 나와 있는 부분을 꼭 찾아서 다니느라 넓은 에페스 유적지를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창녀촌의 표시, 공동 목욕탕, 화장실, 그리고 황제들을 기리는 신전들, 헤라클레스의 문, 니케의 부조 등 지도를 보며 하나 하나 찾아 다니다 보니 작렬하는 태양이 내 몸을 녹여버릴 듯 견디기 힘들다.

한참이 지나서야 에페스의 북쪽 문으로 빠져 나온 나는 어쩔 줄 모르며 서 있었다. 처음에는 시골길을 걸어서 쉬면서 숙소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탈진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돌무쉬(터키의 미니버스)라도 지나가면 얼른 집어 타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다. 남쪽 문처럼 붐비지도 않아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다. 어디 앉아서 시원한 음료수라도 먹고 싶은데 딱히 그럴 곳도 보이지 않는다. 다리를 질질 끌며 도로 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걸어가다가는 쓰러질 판이었다.

'조금만 참자. 처음 출발한 아래쪽 출구에는 차가 많았으니까 돌무쉬가 다닐 거야….'

이 생각을 위로 삼아 천천히 내려가지만 주저앉아 누워버리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바로 그 때 반대편 차선에서 낯익은 봉고차가 보였다. 클레오파트라 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했다. 아주머니는 손짓으로 기다리라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살았다. 머리 속에 그저 살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렇게 다시 시내로 나온 나는 마땅히 쉴 곳이 없어 에페스 박물관에 들어가기로 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햇빛에 처진 몸과 멍해진 머리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멋진 유적지를 보고 박물관을 보는 일은 신나는 일이다. 박물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유적지 옆의 박물관은 다르다. 유적지를 복구하면서 나온 것들을 볼 수 있고 낮에 본 것들을 정리할 시간을 준다. 박물관에는 무너진 신전들의 복구된 모습을 그림으로나마 보면서 상상할 수도 있고 에페스에서 빠질 수 없는 아르테미스 여신상도 볼 수 있다.

a 에페스의 여신 아르테미스. 다산을 나타낸다.

에페스의 여신 아르테미스. 다산을 나타낸다. ⓒ 김동희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글래디에이터 관'이었다. 에페스에도 원형 극장이 있었고 그들도 글래디에이터들의 싸움을 즐겨보았다. 박물관에 있는 이 섹션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뼈를 통해 어떤 무기에 죽었는지 유추해내었고 그들이 게임을 할 때 쓰던 무기들이 종류가 무엇이었는지도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그저 영화에서 보던 그들의 삶이 죽음의 잔재를 통해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남길 수 있던 것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표시되어 있는 상처 입은 뼈뿐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엑스트라들이 죽어갔을까. 사람들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하는 경기를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모두 광분하며 즐거워했을까. 그 누구도 인간의 생명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화려한 도시 안에는 어두운 부분이 항상 함께 존재한다. 그것은 현재나 과거나 마찬가지인 듯싶다. 에페스의 화려한 신전들과 여신상, 그리고 멋진 마차들이 지나다녔을 거리들 그 골목들 사이사이에 그 화려함에 가려 상처입고 묻혀진 삶들이 느껴진다. 그 지친 삶들이 쉬듯 에페스도 그렇게 도시의 역할을 은퇴하고 조용한 산 아래에서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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