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현대차 대선자금에 대한 관계자의 증언을 전하며 글로비스 비자금과의 관련성에 의문을 제기한 <경향신문> 12일자 보도.<경향신문> PDF
현대차가 죽은 유령을 부르고 있다. 대선자금 유령이다. 현대차 계열사인 글로비스 비밀금고에서 나온 60여억원의 비자금이 2002년 대선자금으로 쓰고 남은 돈이라는 의혹이다.
주목할 점이 있다. 이 의혹이 불거진 곳이 바로 한나라당이란 점이다. 2002년 대선 때 현대차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접선'해 100억원을 차떼기한 곳이 바로 한나라당이다. 그런 한나라당이 글로비스 비자금과 대선자금 관련 가능성을 제기했다.
발단은 지난 10일. '김재록 게이트 진상조사단'이 A4용지 두 장 분량의 내부보고서를 당 지도부에 전달했는데, 핵심 내용은 글로비스 금고가 대선자금 관리를 위해 비자금을 만들었으며 당시 조성한 전체 비자금 규모가 트럭 두 대 분량이었다는 것.
한나라당 진상조사단은 검찰이 이런 정황을 잡고 조사 중이며 이 내용이 언론에 공개될 경우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진상조사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언론에 의해 공개됐다. 어제 <한겨레>가 보고서 내용을 보도한 데 이어 <경향신문>은 오늘 현대차 관계자의 증언을 1면과 사회면에 큼지막하게 실었다.
증언 내용은 한나라당 진상조사단이 파악한 것과 대동소이하다. 2002년 대선 당시 계열사에서 거둬들인 현금 뭉치를 인쇄용지 박스 40개에 담아 실어날랐다는 내용이다.
검찰은 대선자금 관련성에 대해 "금시초문"이라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규명을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다. 물론 규명 주체는 검찰이다. 하지만 검찰이 적극적으로 규명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의혹에 대한 검찰의 대답은 단답형이었다. "금시초문"이란 말이었다.
하지만 흘려버릴 수 없는 말도 했다. 검찰은 이전에 글로비스 금고에서 찾아낸 비자금은 전체 비자금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로써 현대차에 대한 검찰 수사의 관전 포인트 하나가 잡혔다. 비자금 규모와 출처·용처에 대한 수사는 당위다. 중요한 점은 대선자금 관련성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비자금의 성격을 불법 대선자금으로 단순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동아일보>는 현대차가 2001년 이후 투자회사를 앞세워 계열사 수를 늘리는 과정에서 비자금을 사용한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뭘 뜻하는가? 비자금의 성격이 어느 하나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복잡하다. 전체 비자금 중에서 몇%가 불법 대선자금용이었다고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한 문제가 있다. 검찰이 지금에 와서 현대차의 불법 대선자금을 전면적으로 캐면 2002년 대선자금 수사결과를 뒤집게 된다. 더구나 검찰은 2002년 대선자금 수사는 정치권의 압력을 뿌리치고 독립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고 자평해왔다. 그런 마당에 이제 와서 제 발등을 찍을 수 있을까?
이뿐이 아니다. 다 끝난 일로 여겨졌던 2002년 대선자금 문제를 다시 들추면 정치적 의도를 둘러싸고 정치권과 공방을 벌일 게 뻔하다.
그래서 쉬워보이지 않는다. "글로비스 비자금은 전체 비자금 중 극히 일부"라는 말보다 "금시초문"이란 말의 여운이 더 길다.
대선자금 건드리지 않으면 '분식 수사'